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08:11:32

권혁주(바이올리니스트)

파일: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png
이름 권혁주 (Hyuk Joo Kwon)
본관 안동 권씨[1]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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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85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사망 2016년 10월 12일 (향년 30세)
부산광역시
학력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1. 개요2. 생애3. 사망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한국의 1세대 음악영재이며 한국계 남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세계적인 수준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SNS 활동과 많은 연주회를 가져,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많은 마스터 클래스에 출강하면서 음악인들에게도 가장 인기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큰 무대, 작은 무대 가리지 않고 많은 무대에 선 데다가 많은 마스터 클래스 출강 등으로 교육 쪽에 공헌을 많이 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파가니니)와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등의 파가니니 곡들 연주에 본좌라고 평가를 받았다. 1포지션 하모닉스로 정확한 음정을 짚고, 지판 끝까지 가볍게 올라가는 화려한 기교, 리코세 주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등 화려한 테크닉을 보여주었다. 권혁주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파가니니 곡만은 인정할 정도.

1998년부터 2015년까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후원한 1763년산 과다니니를 임차하여 사용했다. 과다니니는 바이올린의 3신기 중 하나로 꼽히는데, 특히 그의 악기는 보존 상태가 좋아 수십억 원을 호가해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꿇리지 않을 정도. 그리고 현은 유명한 현 제조사인 덴마크의 Larsen Strings에서 후원받아 사용했다. 그 외 다른 스폰서에서도 악기를 후원했지만 주로 사용하는건 금호에서 후원한 과다니니였다.[2]

2016년 10월 12일 연주차 방문했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택시 안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요절해 많은 클래식 팬들에게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2. 생애

서울에서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왔으며, 무려 만 3세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해 3년 후 음악저널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대상을 안았다. 7세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 김남윤에게 바이올린을 사사한 후 9세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모스크바 중앙 음악학교에서 1930년대 러시안 학파를 대표하는 스톨리아르스키와 얌폴스키를 모두 사사한 에두아르드 그라치 교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크렘린궁에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 초청으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졸업 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11세에 제3회 차이콥스키 청소년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2위를 차지하면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으로부터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3][4] 바이올린 영재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세에 독일의 클로스터‐셴탈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7세에는 러시아에서 열린 제3회 얌폴스키 콩쿠르에서 그랑프리 및 ‘멘델스존‐얌폴스키의 론도 카프리치오소 최고 연주자상’을 거머쥐었다. 2004년 칼 닐센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19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 우승과 함께 덴마크 작곡가 작품 특별상, 젊은이 인기상을 두루 석권했으며 제 2회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콩쿠르에서도[5]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2005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6위)을 통해 그 음악성과 기량을 검증받았다.

이후 콩쿠르에 나가는건 그만두었으며,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서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등에 출강하여 후학 양성에도 힘써왔으며, 2012~13년에는 안양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 제2회 금호음악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7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본격적인 연주자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오케스트라 협연과 독주회, 실내악 가리지 않고 연주회를 하였으며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게 된다. 거기에 2013년에는 자신이 리더로 역시나 금호 키드인 3명의 연주자와 함께 칼라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해 매년 굵직한 연주를 이어왔다. 예를들어 2015년 9~10월에는 4회에 걸친 연주로 쇼스타코비치 현악4중주 전곡 연주를 끝냈다. 약간 무리할 정도의 스케줄이었는데 결국 건강에 무리가 와 2016년 9월 건초염·건막염·테니스엘보우·퇴행성 관절염 등의 증세로[6]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주의 짧은 회복 기간 후[7] 연주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클래식 팬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긴 했지만 상상도 못했던 비통한 일이 벌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3. 사망

권혁주는 2016년 10월 12일 오후 7시 30분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움 챔버 오케스트라 창단연주회를 위해 11일 새벽 차를 몰고 부산에 왔다. 해운대에 있는 한 호텔에 방을 잡고 나서 11일 오후 6시 30분 부산문화회관에서 리허설을 마쳤다. 같은 날 오후 8시 20분께 택시를 타고 남구에 있는 친구 집으로 이동해 친구와 청주를 2~3잔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2일 0시 10분에 택시를 타고 해운대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고 20분 뒤 호텔에 도착한 택시기사가 도착했다고 말하며 뒤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눈을 감은 채 숨져 있었다. 깊이 잠든 줄 알고 기사가 흔들었을 때 힘없이 쓰러지자 놀란 택시기사가 곧바로 경찰과 병원에 신고했으며 호텔 직원이 바로 나와서 응급차가 올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고 뒤이어 119 구급대원이 이어받아봤지만 결국 안타깝게도 멈춘 심장박동이 되돌아오지는 못했다. 향년 30세.

오전 10시 경에 부산일보에서 그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며 대중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난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사람들이 믿지 않거나 이 소식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마 후, 여러 인터넷 신문사에 이어 메이저 언론사끼지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하며 오보가 아님을 확인한 그의 팬들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천재 연주자의 급작스런 요절이란 점에서 음악계나 음악애호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관심도 커서 클래식 음악가로서는 이례적으로 그의 이름이 하루 종일 포털 사이트 실검 1~2위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9시 뉴스에까지 보도되었을 정도였다.

활발한 연주자 활동을 이어왔었고, 사망 당일에도 연주회가 잡혀 있었으며[8] 전날까지만 해도 페이스북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상상도 못했던 요절이었다. 많은 클래식 사이트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소지품에서 발견된 부정맥 치료약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부정맥이 사인인가 했지만,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드러났다.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13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과 함께 권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외상은 전혀 없었고 혈전이 관상동맥을 막아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혈전이 심장에 영양분 등을 공급하는 혈관을 막아 심근경색이 일어났고, 심정지로 이어져 숨졌다는 것.

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부정맥 약은 메토프롤롤 등의 베타차단제가 유력한데, 주기능은 아니지만 교감신경을 억제하기 때문에 안정효과와 심박수 감소를 일으킨다. 순간적인 긴장이 결과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예체능 종사자들은 암암리에 많이 복용하는 약이며, 다른 향정신성 약물에 비해 신경계 영향이 적기 때문에 퍼포먼스에도 무리를 주지 않는다. 아무튼 매우 흔히들 복용하는 약으로 이것으로 부정맥이 지병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약은 혈관을 넓히고 심박수를 감소시켜 급성 심장질환에 좋은 영향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은 심근경색으로 숨졌다는 것은 젊은 나이라도 흡연, 스트레스, 가족력 등으로 인해 심장에 무리가 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고인은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하며 직전의 술자리에서도 과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흡연을 즐겨 소지품에서도 담배가 나왔고 연주를 앞두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9]

4. 기타

파일:권혁주 라센.png
한국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고, 전공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라센 현의 광고 모델을 하기도 했다. 현악기 전문 악기사에 가면 저 책자 하나씩은 꼭 볼 수 있었다.

평소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는지 연주회 때마다 직접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거의 매일 연주회가 있을 정도로 무대를 가리지 않았으니 상당히 무리한 셈이다.

2017년 10월 13일, 그의 1주기를 맞아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그의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음악회 시작 전, 권혁주의 어머니가 직접 준비과정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2022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권혁주 음악 콩쿠르'가 열리고 있다.


[1] 36대손 '혁' 항렬이다. 같은 파자를 쓰는 인물로는 야구선수 권혁, 랩퍼 로꼬(본명 권혁우) 등이 있다. [2] 2016년 직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오디션을 통해 당시 16세였던 김동현에게 대여되었다. [3] 이 때문에 본격적인 연주자 활동을 시작한 2007년 이후에 금호아트홀에서 연주회를 상당히 많이 가졌다. 사실 그전 유학시절부터도 종종 금호아트홀에서 연주를 했었다. [4] 그를 포함해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거쳐갔던 광화문 금호아트홀은 2019년 5월 1일부로 폐관이 결정됐다. [5] 얼마전에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한국 최초로 우승한 프레미오 파가니니 콩쿠르와는 다른 대회이다. [6] 원래 건초염만 생겨도 상당히 무리했다는 것이다. 왜 이정도의 증세를 얻었냐면, 권혁주는 파가니니 연주에 호평을 받았고 그때문에 많이 연주했다. 하지만 그런 기교적인 곡일수록 당연히 손엔 더 무리가 많이 가게 된다. [7] 바이올린 전공자들의 건초염의 수술 후 회복 기간은 4주 정도니까 상당히 무리를 한 셈이다. [8] 당연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연주회는 취소되었다. [9] 다만 담배는 혈관을 좁게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동맥경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가족력과 타고난 혈관건강이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