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02:45

권도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권도인
權道仁 / Doin Kwon
파일:권도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안동 권씨
출생 1888년 9월 27일
경상도 영양현 석보면 북계동
(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 북계마을) #
사망 1962년 4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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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도인은 1888년 9월 27일 경상도 영양현 석보면 북계동(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 북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후 군위군 소보면 위성동으로 이주했다.

그는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계약이 종료된 뒤 1910년경 호놀룰루에서 점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12년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한 이희경[1]과 결혼했으며, 1920년대초 대나무 발에서 착안한 커튼을 개발해 1924년에 특허를 취득했고, 1928년에는 포인시아나 블라인드(Poinciana Blind)라는 가구점을 개점하였다. 1929년 대공황으로 경영 위기가 찾아왔으나 1936년에 다시 가구점을 경영하면서, 임시 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하며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였다.

1937년 8월 27일, 권도인은 하와이 국민회 총회를 통해 독립군 활동 지원금을 보내고 독립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연금을 납부하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재무부, 선전부, 기밀부로 조직된 찬무부를 조직하고, 권도인은 재무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10월 20일 국민회와 동지회 간 통합 문제를 논의할 당시,한길수, 김원용, 정인수와 함께 국민회 위원으로 선출이 되어 통합 작업을 진행했다. 1938년 미국 국방과 안전을 위한 방첩 활동 및 반일인 선전 활동에 주력하고자 중한민중동맹단이 공식 설립되자 이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후원을 위해 결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 13일 미주 지역의 6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여 결성한 연합한인위원회의 훈련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41년 4월 16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북미와 하와이 지역의 9개 협회가 통합을 목적으로 해외 한족 대회를 준비하던 당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대표이던 황사용이 갑자기 사임하고 권도인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그는 미국의 국방 공채를 매입하여 미국을 후원하자는 분위기가 감돌자 국방공채위원회 설립에 관여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1950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말년을 고생하다 1962년 4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권도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본명은 이금례(李今禮).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남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거주하면서 대구신명여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