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16:29:58

광개토대왕/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광개토대왕
{{{#!wiki style="margin:-10px" <tablebordercolor=#000> 파일:고구려 군기.svg 광개토대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0000,#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 생애 · 평가
관련 장소 태왕릉
관련 문서 광개토대왕릉비 ·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 광개토대왕(동음이의어)
매체 대중매체
연호 영락
}}}}}}}}} ||


1. 개요2. 즉위 이전: 주위 정세와 성장3. 원년~6년: 남정 백제 북벌 거란
3.1. 즉위 1년차의 맹활약3.2. 근성의 아신왕3.3. 거란-비려 원정3.4. 백제의 항복
4. 6년~9년: 주변 정리
4.1. 요동 확보4.2. 숙신족 복속
5. 9년~17년: 서방의 후연과 남방의 백제·가야·왜국 연합군
5.1. 신라 구원과 백제ㆍ가야ㆍ왜국 연합군 처단5.2. 고구려의 왜국 침공5.3.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6. 17년~22년: 말년
6.1. 남연과의 교섭6.2. 태자 책봉 등6.3. 동부여 정벌
7. 내치
7.1. 고구려 중심 독자 천하관 성립7.2. 독자 연호 제정7.3. 관직 정비7.4. 불교 진흥7.5. 평양 천도 추진7.6. 수묘인 제도 정비7.7. 〈요동성 육왕탑 설화〉
8. 최후9. 《삼국사기》 기록

[clearfix]

1. 개요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桭被四海。掃除不▨、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卅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18세에 등극하여,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은 황천(皇天)에 미치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하지 아니한 것을 쓸어버리자, 사람들이 그 업에 편안히 하게 되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은성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414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광개토대왕릉비〉 1면 5행 ~ 6행

2. 즉위 이전: 주위 정세와 성장

파일:attachment/391map.psd.jpg
광개토태왕 즉위시의 고구려 주변 국가[1]
고담덕이 성장하던 소년 시절의 고구려는 내적으로 고국원왕 시대에 손실되었던 군사력이 다시 강화되고, 소수림왕 시대에 이루어진 통치 체제의 정비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서쪽인 요동에는 할아버지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을 털어간 전적이 있었던 선비족의 연나라( 전연)가 저족 전진한테 잠깐 멸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후연) 요동과 화북을 휩쓸었고, 남쪽으로는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한성 백제가 여전히 한반도의 패권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서북으로는 거란이라 불리기 시작한 일군의 유목 부족이, 동북으로는 동부여가 자리 잡아 지속적으로 배후의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고달가의 정벌 이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던 숙신도 이즈음에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구려 외부의 불안은 내부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고구려의 대외적인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백부 소수림왕은 남쪽의 백제 방면으로, 부친 고국양왕은 서쪽의 후연 방면으로 각기 진출을 시도했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고, 성과도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고담덕은 그 나름대로 고구려의 상황을 분석하고, 여기에 청소년기의 도전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고구려라는 제국의 현실에 알맞은 미래상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 《 삼국사기》는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나면서 웅위롭고 남달리 높은 뜻이 있었다.
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전하고 있다.[2]

서기 384년 11월, 고담덕의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왕의 동생이자 고담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즉위했다. 이에 따라 고담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고국양왕 3년에 12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인 서기 391년 5월, 고국양왕이 죽자 고담덕은 부왕을 계승해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고구려의 새로운 태왕이 되었다. 광개토대왕과 그의 전쟁의 시작이었다.[3][4]

3. 원년~6년: 남정 백제 북벌 거란

3.1. 즉위 1년차의 맹활약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전쟁포로 500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0,000명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撃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원년.[5]
태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의 사병 제도를 철폐하여 군대 통일시키는 등 정복 전쟁을 위한 사전 준비를 철저히 실행한 후 출병했다. 즉위한 지 2개월만인 원년 7월에 친히 4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진군해 백제를 정벌했다. 이로 인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개 성과 한강 이북의 부락 다수가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때 광개토대왕이 보여 준 군사적 재능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백제의 국왕이었던 진사왕이 '담덕이 전쟁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어 싸우지도 못할 정도였다.

9월에는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에 포로로 잡혔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거란족 500명까지 전쟁 포로로 사로잡아오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사실 광개토대왕 원년의 북부 전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데 태왕은 여전히 남부 전선에 머물러 있고 북부 전선에서는 다른 장수가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관미성이 함락되고 남부 전선이 정리된 뒤에는 광개토대왕도 거란 전선에 합류했을 것이다. 〈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려 전선 기록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토벌했다(躬率往討)'는 말이 분명히 나온다. 흔히 이때 되찾아 온 고구려 신민들을 14년 전인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8개 부락을 약탈해간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하지만 이때까지 잡혀간 포로의 수가 10,000명에 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란의 약탈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즉위 원년 거란의 정벌을 능비에 기록된 395년 비려 정벌과 같은 사건이라고 추론하는 경우도 있는데, 능비에 기록된 비려 정벌 기사에는 태왕이 친정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침공했는데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 동안 끈질긴 공격을 감행한 끝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 교동도라는 설이 있고,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파주 오두산성이라는 설도 유력하며, 소수설로는 예성강 하구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관미성이 어느 곳이든 한강의 하구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라는 점에서는 모든 견해가 일치한다. 관미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백제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위기였던 것이다.

반면에 광개토왕릉비에는 관미성과 같은 지명으로 추정되는 각미성을 396년에 함락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잘 정돈해서 각각의 세력에 대항해 무슨 훈적을 남겼는지 서술한 능비의 성격상, 396년의 훈적에 편입된게 아닌가 추정한다.[6]

392년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으로 사냥하러 나갔다가 1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군주의 사냥이란 군사력 과시와 군사 훈련의 의미를 겸비하는 것이므로 이는 진사왕이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려 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사왕은 그렇게 달을 넘겨 11월이 되자마자 구원의 행궁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진사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해서도 이설이 엇갈리는데 바로 진사왕 사후 백제의 왕위 진손왕이 아닌 조카 아신왕에게로 계승된 것이다.[7] 이에 대해 《 일본서기》에서는 본디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할 침류왕의 아들 아화가 즉위하기도 전에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았고, 이후 진사왕이 일본 천황에게 실례하였다는 이유로 백제 사람들이 진사왕을 죽이고, 조카 아화를 세우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진사왕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일본서기》의 주장이 유력해진다. 애초에 즉위부터가 아신왕에게 갈 왕위를 빼앗은 것이니 정통성이 취약했고, 유능해보여서 국정을 이끌기는 했는데 고구려의 어린 왕에게 대패한 뒤 능력까지 의심받아 끌어내려졌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서기》 기록대로 일본 천황의 의도만으로 백제의 국왕을 죽이고 살리고 했을 가능성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진사왕의 구원 행차가 실제로 사냥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여 즐겁게 놀고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유인만 잘 한다면 암살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장소로 변한다는 사냥터의 속성을 이용해 아신왕이 시해했을 것이다. 물론 《 삼국사기》 기록에 '행궁에서 죽었다'는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행궁으로 옮겨진 뒤 승하했을 것이다. 군대 정비와 반격 준비가 목적이었다고 하면 진사왕이 레임덕 상태인 가운데 왕위를 노리고 있는 왕족과 군사를 이끌고 한 자리에 모인 귀족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일정 부분 신뢰한다면 아신왕은 즉위 과정에서 의 대대적인 군사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이는 나중에 나올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와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신왕이 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느라 태자를 왜국으로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8]까지 불사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있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3.2. 근성의 아신왕

이후 영락 5년에 비려 토벌이 완료되기까지, 광개토대왕은 거란 - 비려를 상대로 한 북방 전선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2년부터 광개토대왕 4년까지 남방 전선에서 백제의 공격을 받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 아신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동명왕의 사당과 천지신명에 제사를 올리고, 개각을 단행한 듯, 출중한 용맹과 지략으로 명망이 높았던 자신의 외삼촌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9] 그리고 그해 8월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말하며 고구려를 향한 반격을 시작한다.
關彌城者、我北鄙之襟要也。今爲高句麗所有、此寡人之所痛惜、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관미성이란 곳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다. 지금 고구려가 가진 바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슬퍼하는 바로,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

그러자 진무는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가 석현성 등 5개 성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진무는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공격해 들어갔지만 군량 수송이 끊어지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본기〉에서는 단지 "백제가 쳐들어오자 장수를 보내 막았다."라고 써놓은 게 고작이다.

이와 더불어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영명사와 중흥사가 이때 지어진 절로 꼽힌다. 영명사는 목은 이색의 〈 부벽루〉에 등장하는 절이다. 〈부벽루〉만이 아니라 다른 문학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고, 일제 강점기 때는 31본산 중 한 곳이었을 정도로 유명한 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벽루도 광개토대왕 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곤 한다.

이어서 광개토대왕 3년 7월에는 아예 아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태왕도 직접 정예 기병 5,000기를 이끌고 수곡성 밑에서 싸워 격퇴했다. 이듬해인 광개토대왕 4년 8월에도 백제의 좌장 진무가 다시 쳐들어오자, 태왕이 다시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격퇴했다. 이 전투로 백제군 8,000명이 고스란히 갈려나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수급 8,000여 개를 노획했다(虜獲八千餘級)'고 나오고, 〈백제본기〉에는 '죽은 자가 8,000명(死者八千人)'이라고 나온다.[10]

그해 11월에 아신왕은 패수에서의 대패에 보복하고자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청목령 밑에 이르렀지만, 때마침 폭설을 만나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한산성(漢山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

백제는 거의 매년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추수기를 노리고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백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비상시에는 군량의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는데다, 빼앗을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천고마비의 고사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원년의 관미성 전투 기록이나 〈광개토대왕비문〉 영락 6년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더욱 상세한 전황을 전하고 있다. 이건 〈백제본기〉의 기록이 고구려나 신라 것을 참고한 게 아니라, 백제 측의 기록이 전해진 기사로 보이고, '사료가 부족해서 아신왕의 승전이 전해지지 않는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성이 낮아진다.

자잘한 규모의 전투들도 전부 기록되었고, 또한 거의 1년 주기로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 2년에서 광개토대왕 4년까지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한 것은 한국 고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누락없이 기록이 살아남은 사건으로 보인다.

3.3. 거란-비려 원정

《위서》 〈거란전〉에 따르면 거란은 388년에 북위가 동쪽으로 고막해를 정벌하면서 고막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력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 '거란'이라는 칭호는 5세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10년 앞선 378년에 이미 거란이 고구려의 북변을 침탈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의 거란은 아직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한 초창기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거란 원정 때부터 광개토대왕의 지시로 더욱 발달한 개마무사들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11]
파일:AE11D206-C586-42D2-BB0C-365C530078F2.png
비려 친정 당시 건넌 것으로 추정되는 시라무렌 강[12]
영락 5년에 광개토대왕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13]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을 격파하니, 600 ~ 700영에 마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요동을 거쳐 국경을 돌아보고 사냥을 즐기다 왔다. 일설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깃발병과 북을 치는 병사들의 수를 늘리고, 기병들의 다리에 나뭇가지를 매달아 간격을 띄워 배치해 먼지 구름이 일어나게 하고, 병사들의 갑옷에 철 조각과 방울 따위를 달아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하여 대군을 이끌고 온 줄로 착각한 비려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의 비려 또는 패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거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요동과 인접해 있는 점에서 위치가 들어맞고, 사람을 돌려받으러 갔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서술과 일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란의 '필혈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설이 있지만, 적어도 요하 중, 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시작된 거란 정벌이 이 시점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복수의 전선을 함께 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광개토대왕릉비〉는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의 정복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당시까지의 경과를 몰아서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은 유목민 마을의 단위라고 한다. 보통 100개의 게르가 모여 1영을 이룬다고 하는데[14], 이에 따르면 비려의 인구는 700영 × 100게르 × 5인[15]으로 자그마치 35만명에 달한다. 하지만 유목민 마을이라는 것이 애초에 100개 단위로 정확히 끊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위서》에 따르면 당시 거란은 대다수가 북위군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 흩어진 상태였으며, 또한 영(營)과 부(部)가 서로 병렬적인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요동을 거쳐 돌아왔다는 서술을 자세히 보면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로 흔히 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고, 북풍과 역성은 모두 요동군에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고국양왕 때까지만 해도 요동은 후연의 땅이어서, 거란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요동 일대를 확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후연의 양평령 단등의 묵인하에 요동 땅을 맘대로 지났거나, 이미 그 이전에 양평을 제외한 요동 일부, 즉 역성과 북풍을 미리 확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성과 북풍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설이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특히 북풍의 위치에 대해 혹자는 요양 북쪽이라거나 심양 서쪽이라 하기도 하고, 막가면 통화 즉 국내성 인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표시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이 부분에서 '비려'라는 판독을 따를 경우, 碑麗라고 쓰는데, 여기서 앞글자는 '비석'이라는 뜻이고, 뒷글자는 '매다'라는 뜻이 되어 비석에 매달아놓은 제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백제를 '백잔'[16]으로, 왜를 '왜구' 등으로 멸칭한 것과 같은 거란 필혈부에 대한 멸칭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한자의 뜻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단순 음차 표기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 비려(패려?)의 정체는?
    • 부산적: 신대왕 5년 (기원 후 169년)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 《삼국사기》 // 이 기록의 부산적이 비문에 나타난 부산이라는 지명과 통하는 점에 착안하여 부산적이 비려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세력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부산은 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 일대라고 한다.
    • 《진서》에 나오는 비리: 당나라 시기에 편찬한 동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에 비리라는 세력이 나온다. 숙신의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나온다고 한다. 너무 멀다... 물론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 것은 맞지만, 200일 어쩌고 하는 부분이 잘못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록 자체는 바로 밑 《위서》의 것보다 좀 늦지만 시기는 아래 《위서》의 기록이 5세기이나 이것은 4세기로 좀 빠른 편이다.

  • 북위측 기록의 필혈부: 《위서》 〈거란열전〉에 나오는 필혈부와 같은 세력이라는 설이다. 《위서》의 편찬 시기가 6세기 북제 시기임을 고려하면 그럴싸하다.
    • 거란 측 기록의 비리: 저 멀리 거란의 역사를 다룬 《요사》의 〈지리지〉에 비리군(陴離郡)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거란에서 집주 회중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한나라 때 험독현, 고구려 때 상암현에 속했다고 한다. 이 비리군이 비려족의 위치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요사》 〈지리지〉의 신뢰도와 500여년을 훌쩍 뒤어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적 격차를 생각해보자.
    • 또다른 고구려라는 설: 거란계의 부족이라는 일반적인 논지와 달리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설. 고구려의 끝 글자인 麗자가 비려의 끝 글자이기도 한 점에 주목하여 비려라는 뜻을 고구려에 반발적인 고구려계의 부족에 대한 멸칭으로 보고, 고구려의 선조인 대수맥과 대립한 소수맥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소수맥은 이미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에 흡수되어 안드로메다로 사라지고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3.4. 백제의 항복

영락 6년, 북방 전선에서 거란 - 비려와의 전쟁도 마무리되었고, 이제 광개토대왕은 그동안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에 연례 행사처럼 매년 집적거린 것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밀고 들어갔다. 수로와 육로 양면으로 진공하여[17] 아단성, 미추성, 대산한성, 고모루성 등 수십 개의 성이 무너지고, 백제의 수도로 압박해 들어가니, 그때까지 함락된 백제의 성이 모두 58성에 700촌이었다.[18] 《일본서기》에는 이때 빼앗긴 땅을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이라 하고 있다.[19]
파일:attachment/hansungattack1.png
파일:attachment/hansungattack2.png

하지만 그럼에도 아신왕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어 응전하려 하자, 광개토대왕은 화가 나서 아리수를 건너 한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군대가 격퇴되고 한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러 처지가 곤란해진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태왕 폐하의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맹서를 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당당히 수도인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이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직접적인 전쟁은 끝난 것 같았다. 고구려는 남방 전선에서 백제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아신왕은 무릎 꿇고 항복한 것도 그냥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였을 뿐, 이후로도 계속해서 반격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다만 이건 백제 입장에서 하는 얘기고, 그간 이어진 백제의 지속적인 습격 시도와 고국원왕 살해의 옛 원한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 당시에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상당히 너그럽게 봐준 편이었다. 그런데 왜군까지 끌어들여서 이런 식으로 나오니 광개토대왕은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광개토대왕 6년 5월에 아신왕은 태자 부여전지를 왜국으로 보내어 우호를 맺고, 7월에는 한강 남쪽에서 백제ㆍ가야ㆍ왜국의 연합군을 사열한데다, 다시 이듬해 봄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앉히며, 연합군이랑 같이 쌍현성을 새로 짓는 등 반격을 노렸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야심차게 연합군을 이끌고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으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병영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그러자 하늘의 뜻이라 여겨 회군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신왕은 바로 다음달에 도성 사람들을 모아서 활쏘기를 가르치며 긴장 국면을 유지했다. 후술하지만 아신왕은 적어도 한강 북쪽 일대와 개성까진 어떻게든 탈환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 날려버린 영서 일대와 충북 일대는 영영 되찾지 못했고, 이 피해로 웅진ㆍ사비 시절까지 백제는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개로왕 시절 장수왕한테 한강을 뺏기고, 개로왕은 장수왕한테 죽임을 당한다.

4. 6년~9년: 주변 정리

4.1. 요동 확보

이렇게 백제를 항복시킨 광개토대왕은 다시 군대를 북으로 돌려서 광개토대왕 6년에 후연의 요양성을 차지하고, 요동을 완전히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동사강목》에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추산이 아닌지 정확한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 즈음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완전히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는 점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우선 당나라 위진남북조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양서》와 《북사》 〈고구려전〉에
" 모용수가 죽고 모용보가 즉위하자, 광개토대왕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2국 왕으로 봉했다. 요동군을 공략하여 가졌다."[20]
는 기록이 있다. 모용보의 재위 기간이 396년 ~ 398년임을 보면 요동으로의 진출은 대략 이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대왕이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자, 모용보가 이를 인정하는 셈으로 광개토대왕을 책봉한 것 같다는 주장이 현재까지의 통설이다.

또한 원래 요동을 관할하는 평주 자사의 치소는 요동 반도의 평곽이었는데, 402년에 평주 자사 모용귀가 평곽이 아닌 숙군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2년 이전에는 후연이 요동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 해동고승전》에는 396년에 승려 담시(曇始)가 요동에 와서 불법을 전하니, 이것이 고구려가 불법을 들은 시초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397년 이전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확보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아보인다. 다만 《자치통감》에 400년 3월 후연의 양평령 단등이 모반하여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양평현은 본래 요동군의 치소다. 그렇다면 요동군이 400년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400년에 후연이 새로 점령한 신성과 남소성에 양평을 교치했다는 주장도 있고, 요동군의 영역이 고구려에 분점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하여튼 논의가 분분한 상태다.

후연의 역사를 보면, 이 시기 후연이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는 점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395년 후연은 북위를 상대로 참합피 전투에서 참패를 겪고, 모용수까지 분사하면서 국운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북위에게 국토가 유린당하자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397년 용성으로 달아나게 된다. 하지만 398년 용성에서도 난한의 쿠데타로 모용보가 제거되고, 난한은 다시 모용성에게 제거되는 막장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후연의 위축과 혼란은 광개토대왕의 요동 진출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요동 진출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서 훗날 후연군이 요동으로 쳐들어오기도 하고, 그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선이 요서까지 확장되며 요하를 중심으로 후연과 고구려가 공방을 거듭한다. 402년 숙군성을 깨뜨리고도 그것을 유지할 능력이 안 되었는지, 406년 후연이 다시 숙군성에 자사를 배치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4.2. 숙신족 복속

영락 8년, 광개토대왕은 요동의 정반대인 고구려 동북방 변경으로 한 부대의 군대를 파견해 숙신족[21]을 순찰하였다. 이때 그들의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인을 붙잡았다. 이후로 숙신족은 고구려에 조공을 약속하고, 내정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령을 받기로 하여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전의 서천왕 대에도 숙신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때의 숙신족 복속은 재복속이나 지배력 강화, 또는 서천왕 대에 복속시킨 숙신족과는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는 경우, 서천왕때 복속된 숙신은 송화강 유역, 이 때 복속된 숙신은 목단강 유역의 것으로 보는 주장이 유력하다.[22]

이 때의 숙신이란 세력은 훗날 물길 - 말갈로 변모하는 세력으로 발해를 거쳐 여진 - 만주족이 된다라는게 학계의 통설이긴 한데, 연구가 축적되면서 단순한 후신이 아닌, 더 복잡한 이합집산을 거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아무르강,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에 이르며 서남으로는 현재의 연길 지방 이북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숙신'이라 통칭되는 숙신계 종족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서로 남남으로 퍼져 있었다. 광개토대왕 치세때 복속한 숙신은 그 규모로 보아 숙신족 중 일부 세력으로 보인다.

이때 복속된 숙신은 장수왕 때 고구려에 얹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또다른 숙신계인 물길이 성장하여 고구려를 괴롭힌다.

참고로 '식신'( 숙신족) 혹은 '백신'의 정체는 아직까지 불명이다. 위의 서술은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와있는 '백신토곡'(帛愼土谷)[23] 복속 기사를 바탕으로 도출한 것인데, '백신'의 '백'자를 '백'으로 판독하느냐 '식'으로 판독하느냐에 따라 복속 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 비문이 워낙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판독이 어렵고, 따라서 확실히 어떤 단어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帛)자나 '식'(息)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 동예 계통의 세력 : 백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이 아닌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으로 추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399년 ~ 400년에 한반도 방면으로 남진한 것이 근거다. 그 전에 미리 교통 정리를 하며 신라로 가는 길에 강원도에 위치한 동예 제부족을 손봐주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동예 세력으로 알려진 세력들 중 백신이란 이름을 가진 세력이 없다. 또한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은 이미 선대에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태조대왕 동예를 복속하기도 했거니와, 앞선 동천왕 대에 신라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아[24] 적어도 동천왕 대까지는 고구려에서 동예의 방해없이 신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백제의 58성 700촌에 편성되어 있던 동예 세력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 숙신 계통의 세력: '식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의 이칭으로 파악된다. 학계에서는 숙신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한국 고대사 관련 자료에는 숙신이라고 나오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고, 동예와 숙신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가끔 동예와 숙신이 한꺼번에 나오는 실수도 보인다. 하지만 백신이라는 판독이 정확하다는게 확증될 경우 숙신설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숙신을 백신이나 그와 비슷한 명칭으로 칭한 사례가 없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동예라는 확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군지 모르겠다가 되어버린다.
  • 신라 설: 왜구로부터 구원해주러 가며 손봐줬다는 설.
  • 백제 설: 중국 학자 왕건군의 주장. 백제의 일부 영토를 순찰했다는 설이다.

5. 9년~17년: 서방의 후연과 남방의 백제·가야·왜국 연합군

5.1. 신라 구원과 백제ㆍ가야ㆍ왜국 연합군 처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라-왜 전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신라 호우명 그릇.jpg
파일:호우명 그릇 탁본.jpg
경주 출토 호우명 그릇과 그 탁본.
장수왕 시기[25] 고구려가 신라에게 하사한 것이다.[26][27]

399년,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다시 한 번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백성들이 이젠 고구려와 전쟁을 해도 개죽음이란 걸 알았는지 징집을 피해 신라, 가야는 물론이고 적국인 고구려, 말갈, 심지어 바다 건너의 왜국, 동진, 후연 등으로 달아나버려 군사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달아난 백성들 가운데 유즈키노키미(弓月君, 궁월군, ゆづきのきみ)[28]를 필두로 한 일부는 다시 왜국으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신라에게 저지당했다고 보기도 한다.[29]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고구려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백제는 일단 고구려 대신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는 신라부터 정리하기로 생각해, 맹서[30]를 어긴 채 왜국과 화통하게 되었고, 마침내 백제 주도로 끌어들인 왜와 가야랑 같이 신라를 침략했다.

영락 9년, 세 나라의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인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행차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세 나라의 침공을 받았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알려준 뒤 돌려보내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인지 후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지만[31] 모용성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를 잡아 그대로 신성과 남소성을 점령해 버렸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그 와중에도 보병 기병 50,000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냈다.[32]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부터 백제·가야·왜국 연합군을 몰아내며 신라성까지 이르렀고, 연합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패퇴하자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 가야)의 종발성[33]까지 이르러 성을 항복시켰다. 항복시킨 성에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두 가지 해석이 있다)을 했다.

사실 이 대목은 설이 굉장히 다양하게 갈리는 부분인데 주로 '임나가라', '종발성', '안라인수병' 3곳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 임나가라(任那加羅)의 경우에는 이것을 '임나라는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임나가라로 보기도 하고, '임나의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가라국으로 보기도 하며, '임나와 가라'로 보아서 창원의 임나와 김해의 가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는 임나가라를 김해가 아닌 고령군 대가야로 보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34]
  • 종발성(從拔城)의 경우에는 종발(從拔)을 동사로 봐서 '따라서 성을 무너뜨렸다'로 보기도 하고, 이 자체를 하나의 명사로 보아서 '종발성'이라 보고 이를 부산이나 김해에 비정하기도 한다.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의 경우에는 안라(安羅)를 명사로 봐서 ' 안라국( 함안) 사람 수비병'으로 보기도 하고, 이는 가야권 서쪽에 있는 안라국의 위치상 좀 뜬금없는 구절이라 안(安)을 동사로 봐서 '나인(羅人) 수비병을 안정시켰다'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나인'이 누구냐는 문제가 겹쳐서 신라인이라는 설, 가라인이라는 설, 안라인이라는 설, 그냥 나인(邏人)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
파일:attachment/2-12.jpg
백제-가야-왜의 연결

그러나 확실한 점은 이를 계기로 고구려가 한동안[35] 신라에게 내정 간섭 수준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36] 또한 앞서 근초고왕 시기 이룩했던 백제·가야·왜국의 국제 커넥션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해의 금관국은 기존까지 담당해오던 국제 사회의 중간 매개자 역할이 축소되면서 가야 내부의 주도권도 점차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른바 전기 가야 연맹의 와해로 지칭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갈리지만[37] 그 뒤로도 금관국은 일단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구려가 가야 지방에 유형지를 두었다는 기록과 가야의 정치에 고구려가 개입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명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아무튼 할아버지 고국원왕, 큰아버지 소수림왕, 아버지 고국양왕의 한을 어느 정도 푼 셈이다.

이후 영락 14년(404)에 백제, 가야, 왜국이 다시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해 들어오긴 하지만[38] 이내 평양에서 출정한 광개토대왕에게 4년 전처럼 또 궤멸당한다. 물론 영락 17년 기사에서 '사방합전'으로 '참살탕진'된 적국이 백제라고 본다면 이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백제쪽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즈음 백제가 고구려에게 넘어가버린 한북 일대와 청목령(개성) 일대까진 수복하는데 성공했을 확률이 높다. 이후 개로왕 때까지도 개성은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딱히 백제가 대고구려전에서 성공적이지 못했고,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가야와 왜국을 끼고 들어온 백제의 이 배신 행태가 상당히 짜증스러운 어조로 기록된 걸로 봐선 성과가 아주 없었던 아니었다. 그나마 개로왕 때까지 버틴 건 청목령까지라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백제는 광개토대왕 14년에 전지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내분을 겪기도 하거니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친위세력으로 해씨와 목씨가 주도권을 잡다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여 태후의 섭정을 받고 비유왕은 모종의 이유로 들판에 가매장당하는 등 이리저리 치이면서 신라, 남조, 왜국과의 외교에나 전념하게 되는데, 아신왕이 비굴하게 항복하는 시점의 영토를 고구려가 계속 쥐고 있었으면 백제의 이런 꼼수는 불가능했다.[39]

여기까지 정리하면 392년에 남으로 백제 침공, 북으로 거란 침공. 395년까지 남으로 백제 방어, 북으로 비려 침공. 396년에 대대적인 백제 강습. 397년까지 요동에서 후연 세력 구축. 398년에 잠시 북으로 숙신을 치고, 400년에 요동에서 후연 공격 방어. 401년까지 신라에서 백제·가야·왜국 연합군을 몰아내고 가야까지 진출했다. 군대를 동원하기 힘든 계절을 제외하면 거의 쉬지 않고 정복만 했고, 그야말로 전방위적 전선의 공격-방어 교차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이 고등학교 한국사,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사료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도 민심이 동요하지 않고, 가는 족족 이겨먹었다. 사실 고대나 중세 국가들 중엔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군사 활동이 이어지는데도 나라가 부강하고 민심이 안정적인 사례가 의외로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아틸라 시절의 훈이나 카롤루스 대제 시절 프랑크다. 이는 강대한 군대를 그 국가가 장기간 보유하기 힘들 경우 나타나는 현상으로, 잇단 승리와 전리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고 그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상당히 외줄타기에 가까운 국가 운용 방식이며 적정선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각설하고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의 이런저런 세력들을 손봐주는 과정에서 서서히 요동의 패자 자리를 놓고 고구려의 큰 원수이자 숙적인 후연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5.2. 고구려의 왜국 침공

일본서기 리추 덴노(履中天皇) 5년 기록인 404년 영락 14년에 묘한 기록에 대한 기술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에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신화적 문구로 기록되어서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으나 년도수를 얼추보면 덴노가 자신의 아내까지 죽고, 화를 부른 쿠루마모치노키미(車持君, クルマモチノキミ)에게 책임을 물으며, 3신(三神)을 바쳤다라고 되어있다. 피 냄새와 재해, 재난의 주범이 츠루기타치히츠기노미코(劍刀太子王, ツルギタチヒツギノミコ, 검도태자왕)라고 되어 있다.

더욱이 한제이 덴노(反正天皇)는 고구려계로 알려진 인물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승하하자 405년에 그 자리에 앉는다. 이 기록을 두고 고구려가 당시 신라에서 백제, 가야, 왜국 연합군을 몰아낸 뒤 직접 왜국을 침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404년이면 백제, 가야, 왜국이 다시 대방계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격퇴했던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더욱이 기록에서 언급하는 츠쿠시(筑紫)/아와지 섬(淡路島)은 오늘날 규슈지역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당시 이 남방 전선에 집중하는 사이 후연이 공격해 왔던 걸 감안한다면 당시 백제와 가야를 지원하러 병력을 보낸 왜국을 공격하여 정벌전을 펼쳤을 확률이 있다. 고구려의 해상 능력은 5세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최절정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광개토태왕이 백제 정벌 등에서도 해상력을 운영하여 대규모 동원을 해본 바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더욱이 재침을 한 연합군을 학살하고 그대로 왜국으로 진격해 가는 것 역시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만 이 부분은 현재 신화적으로 수식한 기록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불분명하다. 물론 경상남도 지역과 규슈 지역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된 건 사실이고, 실제로 경상도 지역에서 신라 구원 이후 고구려 해군 기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명확하게 나온건 없다.

5.3.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파일:external/blog.gorekun.com/2673956084.jpg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으로 진격하는 광개토대왕 민족기록화[40]

상술한 바와 같이 400년, 후연의 중종 소무제 모용성은 고구려가 신라로 지원군을 파견해서 백제·가야·왜국과 대치하는 와중에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로 쳐들어왔다. 후연군은 모용희(훗날의 소문제)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집어 삼켰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이었다. 신라로 대다수의 병력이 집중된 상황이라 북방으로 방어군을 파견할 수 없었던 고구려는 무력하게 땅을 내줄 수 밖에 없었으나,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세 나라의 연합군을 몰아내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조상들의 원수를 갚을 대반격을 준비한다.

401년,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 모용성이 사망하고, 모용희가 즉위하는 등 후연에 내홍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다시 신성과 남소성을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2년 5월에 광개토대왕은 증조할아버지 미천왕과 할아버지 고국원왕, 큰아버지 소수림왕, 아버지 고국양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보내 후연 평주의 숙군성을 기습 공격했다. 이에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평주가 고구려에 함락된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404년, 대방계를 공격해 온 백제, 가야, 왜국 연합군이 광개토대왕에게 격퇴당한 후인 11월에 모용희는 황후 부씨와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사냥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호랑이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000여 명이나 되었다.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라고 여긴 광개토대왕은 그해 12월, 다시 한번 후연을 공격해 연군에서 100여인을 살육·약탈했다. 연군은 본래 베이징의 계현이 치소지만, 연군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갖다 바친고로 이 시점에는 대릉하 유역에 이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지명 이치는 사료 지리지의 구체적인 기록 내용에 의거해서 주장하는게 기본이라 연군의 요서 이치설은 이런 원리로 생각한다면 증명성보다 자의성이 짙게 배이는 문제가 많은 주장일수밖에 없다 지명은 당사자들의 자료가 아닌 한 그 위치를 추측하기가 어렵고 게다가 이치설의 근거로 주장하는 399년에 연군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갔다 바쳤다는 기록은 북위서라는 북위측의 주관적 기록에 근거한 것이라 연군태수 고호의 투항 기록은 북위측의 자국중심적인 왜곡 의도로 서술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함부로 인용하는건 금물 진서에 고구려에게 공격당한 연군이 후연의 군현으로 나오는데 연군 소유 국가에 대한 진서와 위서의 이런 상반되는 서술 행태를 보면 객관적으로 어느 한쪽이라고 단정짓기 힘들다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저서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서 앞선 모용희의 사냥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출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짐승이나 동사로 5,000여 명이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한참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처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사냥이나 다니고 있다는게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후연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405년에 이르러 모용희가 군대를 몰아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온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와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한다.

그해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생각보다 강했던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하고 만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행한 황후 부씨가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치중까지 내버리고 3,000리를 달려서 꿩 대신 닭이라고 고구려의 목저성을 기습했지만 참패하고 만다.

광개토대왕 15년 봄에 고구려에 가뭄이 들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기간에는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후연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듬해 고구려의 사정은 궁궐을 증축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여겨진다.

영락 17년에는 광개토대왕이 보•기 50,000명으로 모종의 적과 '사방합전'(四方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했다. 노획한 개갑이 10,000여 령이고, 군수 물자가 부지기수로,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누성, 우불성 등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 부분에서 적이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판독 불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적을 후연으로 보는 설과 백제·가야·왜 연합군으로 보는 설로 갈리고 있다. 만약 후연이라면 같은 해에 발생한 후연의 멸망과 큰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같은 해인 광개토대왕 16년 7월에 후연의 한족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막장 황제 모용희의 목숨을 빼앗고, 모용운을 추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용운은 본래 고구려의 지파로서 과거 환도성 함락 당시 전연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으며, 후연의 열종 혜민제 모용보의 양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제위에 오른 뒤 고씨로 성을 갈았다. 후연이 북연으로 바뀐 것이다.[41] 하필이면 고구려 사람인 모용운을 골라 세운 것으로 미루어 풍발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단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17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족을 베풀었다.(叙宗族)' 모용운이 고씨로 성을 회복한 것을 본가인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6. 17년~22년: 말년

6.1. 남연과의 교섭

408년 광고를 도읍으로 삼아 산동 일대를 장악한 남연에 사신을 보내어 천리인(千里人) 10명과 천리마 1필, 큰 곰 가죽, 장니[42]를 선물로 건넸다. 이에 남연 황제 모용초는 기뻐하며 물소[43]와 (말하는) 앵무새를 답례품으로 보냈다.[44]

전후 맥락을 알 수 없는 기록으로 그냥 단순한 국가 간 교섭인지 다른 배경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6.2. 태자 책봉 등

영락 18년 4월, 광개토대왕은 왕자 고거련( 장수왕)을 태자로 삼았다. 7월 나라 동쪽에 독산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비교적으로 인구가 빈약한 동쪽에 평양의 반동적인 인구를 이주시켜 평양 지배를 강화하고, 동쪽을 개척하면서 동부여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8월 남쪽을 순행했다. 아마 백제ㆍ왜ㆍ가야를 처단하기 위한 순행일 것이다.

6.3. 동부여 정벌

410년 고구려의 동북방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고구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직접 토벌했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수도에 이르자 동부여가 항복했다. 이때에 동부여를 떠받드는 5압로(5부)가 고구려에 투항했고,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을 공파했다. 바로 이전에 고구려가 상대한 후연은 서방인데 동부여는 그 정반대인 동북방이다.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가로질러가며 정복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이 광개토대왕 생전에 공략한 성과 마을의 전부라고 하는데 근거가 매우 부실하다. 그 근거가 〈광개토왕비문〉에 나와 있는 함락된 성의 개수를 도합하면 64개가 되고, 비려에게 얻은 600 ~ 700영에 백제로부터 얻은 700개의 마을을 더하면 1,400개가 된다는 건데 유목민의 마을 단위인 '영'과 백제의 마을을 의미하는 '촌'은 병렬적으로 셈할 수 있는 같은 단위가 아니다. 무엇보다, 비문에서 600 ~ 700개라고 애매하게 적어놨지 700개라고 콕 집어놓지 않았다.

《삼국사기》,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보이는 고구려가 동북방 방면에 행한 일련의 조치는 동부여를 의식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에 인접한 숙신 복속도 동부여 정벌을 위한 전초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가 망할 때 부여천(부여 지방) 인근의 성만 40개 정도라고 했으니 64개의 성에 1,400개의 마을이 꼭 오버는 아니다.

암튼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동부여 정복은 동부여의 세력 규모나 숙신 정복이라는 전초전까지 필요했던 점을 볼때 거란 - 비려 정복이라는 전초전을 치룬 후연 정벌과 신라 복속이라는 부가적인 전쟁을 치룬 백제 정벌에 비견될만한 규모의 정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의 위치는 숙신의 인근으로 삼강 평원 즈음에 위치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노태돈의 주장 이래 동부여의 위치를 두만강 유역과 책성(현재의 훈춘?)으로 보는게 대세다. 그 근거는 부여가 선비에게 멸망했을 때, 부여의 왕족들이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속주 옥저로 도망왔고, 이들이 나중에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고구려가 힘을 잃은 틈을 타 동부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기호의 지적처럼 두만강 유역에서는 동부여라는 존재의 고고학적 확인이 안된다. 더구나 고구려가 아무리 힘을 잃었다한들 일개 망한 나라의 유민들에게 자신들의 속주를 떼어주면서까지 동부여 같은 큰 나라를 세울 발판을 마련해줬을 개연성은 높지 않다.

동부여에 관해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은 길림 일대에 있던 부여족의 일부가 두만강 하류 일대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다는 노태돈의 견해이나 동부여에 관한 감을 잡을 수 있는 고고학적인 단서가 없다보니 반론의 여지가 많은 편이다.

7. 내치

7.1. 고구려 중심 독자 천하관 성립

광개토대왕 시기에 '하늘의 후손'이라는 천손사상을 대표하며 왕권을 정당화하는 고구려식 독자적 천하관이 완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천하관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비문을 보면 백제, 신라, 동부여 같은 예맥 계열 국가는 고구려 천하의 일부로 취급하며 마땅히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속민의 관계로 신라가 침략 당했을 때는 구원을 백제가 고구려의 질서에서 벗어날때는 이탈을 억제하고 바른 길로 훈도하는 고구려의 세계관과 당위성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패려(비려), 숙신, 후연, 와 같은 이민족 세력에 대해서는 무참히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삼국 통일 의식의 시초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 통합 상징'으로도 볼 수 있는 점이다.[45]

실제로 광개토대왕 이후로는 고구려인 스스로가 자신을 삼한인이라 칭하며 한(韓)계로 동화되고, 신라 또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동화되는 등 지금의 단일민족 개념까진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일본 등과는 구분되는 동질의식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는 신라 고려 삼한일통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현재 널리 알고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이른 기록도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이다.
파일:호우명 그릇.png
신라 고분에서 발굴한 광개토대왕 제사용 그릇
한 가지 미스터리한 점이 있는데, 위 사진의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을 포함하여 삼국시대 유물 곳곳에서 발견한 알 수 없는 #자 모양 무늬가 있다.[46][47] 광개토대왕 본인이나 또는 광개토대왕이 이끌었던 고구려군을 상징하는 무늬라는 설, 유물을 제작한 장인의 인장이라는 설이나 단순히 빈 칸을 채우려고 넣은 무늬라는 설[48] 등 여러가지 추측만 나오고 아직까진 여전히 알 수 없다.
파일:경주 옥피리 보관함 첨성대.jpg
경주에서 옥피리와 함께 발견한 보관함에 새겨진 첨성대[49]
누군가는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신라에서도 첨성대 위쪽에 고대 우물 모양이 놓여있는 점, 천정(天井)·천지(天池)라는 말이 있는 점[50], 그리고 ' 한(韓)'이라는 글자의 원래 뜻이 우물 난간이었다는 점을 연관지어 하늘( 해모수)과 ( 하백[51])이 만나는 백두산 천지를 상징하는게 아니냐는 등 고대 한민족의 토착 민속신앙 속 무언가와 관련있는게 아닐까 추측하지만[52] 지금으로선 확실히 밝혀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광개토대왕과 '#'의 비밀(PDF) 제왕의 문

7.2. 독자 연호 제정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독자적인 연호 영락(永樂)이 확인된다. 이 시기 연호가 최초라는 증거는 없고 더 이른 시기의 연호로 추정되는 후보들도 있기는 하지만 일단 한국사에서 연호를 내건 기간이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7.3. 관직 정비

장사, 사마, 참군 등의 관직을 신설했다. 사마, 참군은 군사적인 것과 관련한 관직인데 당시 가장 큰 적국이었던 후연을 정탐하기 위해 만든 관직이라는 설도 있다. 이 관직들을 신설한 시기는 《 북사》 〈고구려전〉 기록으로 보아 396~398년 즈음으로 추정한다.

7.4. 불교 진흥

소수림왕 이래 대대적으로 불교 진흥책을 계승하여 불교와 관련한 몇가지 업적을 남겼다. 《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요동을 차지한 뒤 이 지방의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승려 담시[53]를 파견하여 민심 교화 사업을 펼쳤다. 그 전에 평양성에 9개의 절을 만든 것도 불교를 장려한 것이다. 그의 증손자인 문자명왕도 절을 많이 세웠다. 그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7.5. 평양 천도 추진

많은 이들이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준비하고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기록 등을 보면 평양성 천도는 광개토대왕 시절 때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創九寺於平壤.
3년( 393년),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19년( 409년) 가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禿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 #
재위 2년차에 평양에 절을 무려 9개나 건설했는데 당시 은 현재처럼 단순한 불교 건축물이 아니라 사회 안전망을 담당하는 기관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광개토대왕 재위기를 생각해 보면 9개나 되는 절을 평양에 건설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한 기록이다. 호국불교의 또 다른 예시이다. 또한 승하하기 4년 전인 409년 7월에는 평양으로 사민정책을 추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며 그 직후인 8월에 남쪽 지방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는 국내성 남쪽인 평양성 일대를 순시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또한 당대 기록인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남쪽 외정과 관련한 기록에서 평양으로 행차했다는 것을 두 차례 기록하고 있다. 재위 9년째인 399년에 백제, 가야, 신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평양으로 행차했다는 기록, 재위 14년째인 404년엔 대방을 침공한 백제, 가야, 를 물리치기 위해 평양으로 나갔다는 기록이 바로 그 증거이며 남쪽 방어에 가장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영락 9년 기해(己亥)에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내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영락 1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
그 외에 안학궁을 건설했을 것으로도 추정되는데 기록에서는 광개토대왕 대에 안학궁 건설을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지만 안학궁이 427년에 완공되었는데 규모로 보아 장수왕 즉위 후 10여년 남짓한 시간 동안 당연히 뚝딱 지었을 리는 없고, 광개토대왕 대부터 이미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기록들로 보아 평양 천도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환을 이루려 했다는 대사업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7.6. 수묘인 제도 정비

고구려 왕릉 수묘인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걱정하여 수묘인 제도를 정비했다. 단순히 묘지기들에 대한 걱정 뿐 아니라 과거 고국원왕 12년(342) 11월, 환도성 전투로 인해 미천왕의 능이 전연 모용황에게 털리고 시신을 침탈당했던 일로 인해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듯 하다. #

수묘인 구성은 광개토대왕이 일생동안 잡아온 한(韓)인[54]과 예(穢)인으로 구성된 생구(노비)들이 주를 이루었던 듯 하다. 수묘인 제도를 정비한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강 정복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로 보인다. 수묘인 착취 자체가 대부분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대의 수묘인 제도 정비에 대해서는 아래 인용문을 참고하면 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오직 원근(遠近)[55]에 사는 구민(舊民)들[56]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7.7. 〈요동성 육왕탑 설화〉

삼국유사》에 나오는 〈요동성 육왕탑 설화〉에 고구려의 '성왕'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누군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도 몰랐다. 고구려에서 '동명성왕 주몽'이 있는데 일연은 동명성왕은 아니라고 했다.

한편 〈 모두루 묘지명〉에서 광개토대왕을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이라고 부른 칭호가 보인다. 그래서 〈요동성 육왕탑 설화〉에서 고구려 성왕은 광개토대왕이라는 게 일반적인 설이다. 〈요동성 육왕탑 설화〉의 내용은 여기서 볼 수 있다.

8. 최후

이렇게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던 고구려의 위대한 왕은 413년에 승하한다. 하지만 겨우 39세의 창창한 나이였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최후였다.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 하였고, 414년 9월 29일(음력)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우며 국강상 지역의 산릉에 매장하였다.

그러나 413년에 서거했다는 학설은 능비를 414년에 설치했다는 점에 미루어 보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 삼국사기》에서 왕이 413년 10월에 서거했다는 기록을 1년 당겨와 412년 10월에 사망했고, 장수왕은 아버지를 위해 삼년상 장례를 치룬 뒤 딱 2년째 되는 날인 414년 9월 29일에 릉묘로 이장했다는 학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즉위에서부터 사망까지의 기록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씩 실제 사건보다 늦추어졌다는 것이다. 39세에 사망했다는 능비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하면 고대부터 '만'이라는 개념이 드물었던 동양에서 기존에 통용되던 새는 나이로 374~412년이 맞다. 18세 나이로 즉위했다는 능비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했을 때도 출생년도는 374년이므로 412년 사망설이 설득력이 있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해도 좀 이른 나이에 사망한지라 사망 원인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북으로 남으로 왔다갔다 전쟁터를 오갔으니 그 나이에 병이나 과로, 스트레스로 사망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게다가 여러 전쟁을 거치며 이런저런 상처들도 많이 입었을 테니 그 상처들이 원인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

9.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word-break: keep-all; min-height:(25/18*1em + 5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4a2d5b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 소지 지대로 · 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8권 「신라 8권 (新羅 八)」 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

《삼국사기》 〈광개토왕 본기〉
一年夏五月 광개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10개의 백제성을 빼앗다
一年秋九月 거란을 정벌하다
一年冬十月 백제 관미성을 빼앗다
二年秋八月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평양에 사찰을 창건하다
三年秋七月 정예 기병으로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다
三年秋八月 나라 남쪽에 7성을 쌓다
三年秋八月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이기다
四年 秋八月 임금의 병사가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싸워 그들을 대패시키고,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을 베었다.
九年春一月 사신을 후연에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二月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十年 후연 숙군성을 공격하다
十二年冬十一月 후연을 침략하다
十五年春一月 후연이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六年秋七月 해충과 가뭄으로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十六年冬十二月 후연이 목저성을 공격해왔으나 패배하다
十七年春二月 궁궐을 증축 수리하다
十八年春三月 북연에 사신을 보내다
十九年夏四月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다
十九年秋七月 나라 동쪽에 6성을 쌓다
二十年秋八月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
二十三年冬十月 광개토왕이 죽다

[1] 동부여 같은 경우에는 위치가 통설에 따른 것이며, 다소 이견이 있다. [2] 이 문구의 해석으로는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네이트 한국학 《삼국사기》)'거나 '태어나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거나 '웅위하고 뛰어난 뜻이 있었다.(한국고전종합 DB 《동사강목》)'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허성도 번역 《삼국사기》)'거나 '어려서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고상하였다.( 이병도 번역 《삼국사기》)'는 등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어차피 모두 의미는 비슷하다. [3]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를 391년으로 보고, 《삼국사기》에 고국양왕 말년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된 신라의 고구려 종속화, 불교의 권장, 종묘와 사직의 수리 사건을 모두 광개토대왕 원년의 것으로 넣으려는 주장이 오늘날 대세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상위 문서의 ' 기년 수정론' 단락을 참조할 때 그다지 성과도 없거니와 오히려 연대가 꼬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를 모두 최대한 존중하여 이하 연대는 모두 광개토대왕 X년(《삼국사기》) / 영락 X년(〈광개토왕릉비〉)으로 표기하겠다. [4] 1차 사료인 능비를 토대로 복원된 그의 치세기(391년~412년)는 《삼국사기》의 연호로 기록된 치세기(392년~413년)에서 계속 1년씩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학계의 중론은 세는 나이 기준을 이용해 능비를 토대로 복원된 치세기가 옳다는 것이다. [5] 《삼국사기》의 연표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는 임진년으로 추산된다. 다만 능비문에 따르면 신묘년이 되지만... ' 기년 수정론' 항목 참조. [6] 겨울 10월에 빼앗았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6 광개토왕 즉위년(391)조에는 고구려군이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여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기사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영락(永樂) 6년(396)에 백제를 쳐서 함락시킨 58개성 중의 하나로 관미성이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의 백제 정복을 영락 6년(396)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왕의 정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즉위년인 신묘년(391) 기사가 전치구로 강조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武田幸男, 271~273쪽; 李基東, 49~52쪽). [7]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어째서인지 아신왕을 진사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8] 다만 《삼국사기》에서 아신왕이 태자를 왜국에 보내는 내용이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상하관계에 따른 인질 보내기가 아니라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파견된 것임에 가깝다.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들이 나행주를 필두로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었다. [9] 고담덕이 태자 시절 정찰을 위해 진무의 군영 근처로 왔는데 진무가 고담덕을 일부러 초대하여 망신을 주려 했으나 되레 역관광당한 일이 있어 공공연히 언젠가 고담덕을 내손으로 잡겠다고 떠들고 다녔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10] 진무는 이와 같은 참패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신왕에 의하여 좌평까지 승진하였다. 백제 내에서는 진무를 대체할만한 아신왕의 심복이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11] 개마무사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12] 그리고 남쪽 지류인 랴오허(요하)는 이후 당나라와의 세력 다툼에서 고구려의 전방 거점으로 등장한다. [13]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비려'(碑麗)를 '패려'(稗麗)로 읽기도 한다. [14] 김용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15] 한 게르는 한 집으로 곧 한 가족이고, 한 가족의 구성원을 5인으로 본 기준. [16]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백제 잔챙이들'이라는 멸칭이다. [17]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水軍'이라는 글자를 판독 불명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공략된 성의 위치로 미루어 일단은 수군이 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18] 아단성보다 앞에 각미성(各彌城)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관미성과 동일한 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능비문의 해당 숫자는 이보다 앞서 즉위 원년부터 함락된 모든 성을 망라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 [19] 이 말이 사실이라면 광개토대왕은 전라남도 지역에 월경지를 건설한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일본서기에서 잘못 적었거나 대충(...) 적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20] 요동군 공략 시점에 대한 통설과 그에 대한 이견은 링크을 참조. [21] 광개토왕 비문에는 '식신'이라 나와 있다. [22]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 연구》'(김현숙 저) 참고. [23] '백신 땅의 곡'이라는 뜻. '곡'은 골짜기를 말한다. 토욕혼이 아니라... [24] 더 멀리 가면 이미 대무신왕 대에 신라와 부딪힌다... [25] 을묘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장수왕 3년인 415년을 말한다. [26] 소설가 최인호는 만주 등지를 뒤집고 다니며 연구한 끝에 저 호우명 그릇 바닥의 상단에서 보이는 # 무늬가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추측해내었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는 중국 입국 금지를 당했다. 지못미. [27] 저 # 무늬의 정체는 아직도 불명이다. 최인호는 저것을 백두산 천지를 상징하며 광개토대왕의 시대를 상징하는 무늬로 추측하긴 했으나 학계에서는 이를 정설로 보지 않는다. 이 외에 첫 발굴 보고서에서 나온 바와 같이 빈 공간을 채워놓기 위한 무늬라는 설과 다른 유물들에서도 의미가 없는 글자들이 발견됨에 따라 제조한 이의 서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8] 백제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본명이 아닌 존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도래인 씨족인 하타씨(秦氏, 진씨)의 선조로 여겨지고 있는데 아마도 이로 인해 존칭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신찬성씨록》에서 진시황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어 실존 인물이 아닌 하타씨로 인해 추존된 전설상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29] 신라에서 이들이 왜국으로 이주하려는 걸 막아버린 덕분에 백제·신라·가야·왜국 사이에서 글로벌한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이후 400년 국제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30] 396년에 아신왕이 항복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31] 398년에 모용성이 모용보를 시해한 난한을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는데, 이해 설날에 자신을 '천왕'으로 낮추었다. 이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32] 후연에게 북방이 파괴된 와중에도 50,000명의 대군을 남쪽으로 파견한 것은 400년 초에 지원군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연이 침공하여 군을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33] 지금의 김해 지역, 즉 금관가야의 요충지나 다름없다. [34] 가야(가라)라는 명칭이 가리키는 대상은 가야권에서 주도권을 잡은 소위 '맹주'국이 누구냐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경우는 대가야가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한 시기를 통설보다 좀 더 올려잡은 4세기 중ㆍ후반으로 보는 시각이다. [35] 약 20~30년 정도로 추정한다. [36] 심지어 내물왕이 직접 와서 조공을 바쳤을 정도라 하니 말 다한 셈. [37] 학계에 따라 김해 금관국의 패권은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전에 끝났다, 이 남정으로 타격을 받았다(통설), 남정 이후로도 한동안 금관국의 주도력이 유지됐다는 설이 있다. [38] 대방계는 앞서 대방군이 있던 황해도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위에 제시된 지도상으로 보면 백제가 가야와 왜국을 다시 끌어들인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위와 같은 선례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고서는 멀리 황해도까지 연합군이 공격해 올 이유도 보급선도 없다는 주장이다. [39] 백제 입장에선 국가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쳐도, 그 때까지 백제가 해온 짓들을 보면 광개토대왕 입장에선 꽤 봐 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국까지 끌어들여 약속을 어기고 뒤통수를 쳐댄다가 또 황해도를 넘보니 광개토대왕이 크게 화날 법도 했다. 훗날 이것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흥한 게 아신왕이 죽고 나서 반세기쯤 뒤에 즉위한 개로왕이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수왕의 한성 공격 때 이 빚을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돌려받게 된다. [40]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70년대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고증을 보여준다. 서울대 미대 이종상 교수의 작품으로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조. [41] 물론 모용운 시기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하고, 모용운 시기만 뚝 떼어서 대연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국호는 다 같은 '연'(燕)이다. [42] 障泥 ; 말의 배를 덮어 흙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는 물건 [43] 이 시대 사서에 '수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물소 짐승 자체 보다는 물소의 뿔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각궁을 만드는 주 재료. [44] 출처는 《 태평어람》 359권에 《십육국춘추》의 일문으로 실려있다. [45] 단재 신채호도 광개토대왕을 왜와 선비족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한 사람으로 보았다. [46] # 무늬 말고도 마지막에 새긴 十자 또한 문맥상 불필요한 글자인데 무얼 상징하는지 정확히 해석이 안 된다고 한다. 여러가지 추측하는 설만 무성할 뿐이다. [47] 고구려 아차산 일대 보루군 백제 풍납토성 삼국시대 유적 곳곳에서 발굴한 토기에서도 # 무늬를 발견한 사례들이 있다. [48] 그러나 평범한 토기 유물에서 조차 일부러 그려놓은 듯이 발견되는 무늬기 때문에 아무 이유가 없진 않았을 듯 하다. [49] 입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우물 난간 부분이 □ 각도인 실제 첨성대보다 더욱 ◇ 각도로 새겨놓았다. [50] ' 하늘 천(天)'자는 종교적인 시각에서의 하늘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51] 고구려 건국신화에서도 등장하고, 고구려 사람들이 물의 신이자 조상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중국 신화에서도 나오는 인물이지만 원래는 중국 동북지역 동이족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건국신화 하백의 출자에 대한 인식 재검토 [52] 실제로 세계 각지의 고대인들은 우물을 종교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예를 들자면 제사를 지낸 듯한 신라 우물을 발견한 사례가 있다. 이렇게 우물과 관련있는 종교를 천수신앙이라고 한다. [53] 신라로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54] 기본적으로 삼한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韓은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도 많이 쓰였기 때문에 가야인을 가리킨 것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본쪽 기록에 많다. [55] 멀고 가까운 고구려 지역. [56] 기존 고구려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