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0:02:48

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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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號 / Kwan Kwang Ho[1]

파일:観光号11-46-42.jpg
파일:관광호.jpg

파일:특급 관광호.jpg

월간 한국철도 1969년 2월호에 나온 관광호. 출처

1. 개요2. 구성
2.1. 기관차2.2. 객차2.3. 객차등급
3. 왜 도입되었는가?4. 새마을호 개편 후5. 관련 문서

1. 개요

1969년 2월 10일(시운전은 1969년 2월 8일)에 운행을 개시한 대한민국의 최상위 열차 등급.[2]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 관광호는 현재 ITX-새마을 따위와는 급이 전혀 다른, 레일크루즈 해랑에 필적하는 초호화 열차였다.[3]

최고속도는 1969년 기준 90km/h, 1973년 이후 120km/h로 당대 열차등급들 중 가장 빨랐으며 5시간 45분 (1969년 6월 10일부터 운행시간이 4시간 50분으로 단축) 만에 경부선 서울[4] - 대전 - 동대구[5] - 부산[6]만 정차하며 운행을 시작했다.

2. 구성

2.1. 기관차

열차 등급처럼 1964년 등장하여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지금도 철도 교통 역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신칸센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흔히 신칸센 기관차라고 하는 위 사진 속 7507호[7]가 등장했는데, 저런 모습은 할 게 없어서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객차를 전부 일본에서 들여오면서 기관차도 열차 이미지에 어울리도록 신칸센 0계 전동차 선두차와 유사한 외형으로 개조했기 때문이다. 이 기관차는 한동안 전용 견인기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가거나[8] 화물도색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있던 당시에도 일반 특대형 기관차가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신칸센 기관차는 소수, 그것도 초창기에 좀 운행하다가 사라졌고[9] 실제로 관광호와 1986년 이전까지 새마을호 대부분은 EMD GT26CW가 기관차로 사용되었다. 이후 1971년에 7100호대 기관차가 들어오고, 일부 기관차에 흰색+파랑색으로 도색하고 전용기로 운용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관광호 기관차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신칸센 0계 전동차가 운행하던 도카이도 신칸센 1964 도쿄 올림픽을 맞아 도쿄로 입국한 외국 관광객들을 교토로 실어나르는 가장 빠르고 편리한 수단이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철도교통을 개보수하거나 고속철도를 도입하는 건 이를 선례로 해서, 마찬가지로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때에는 소치까지 고속열차가 들어갔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평창군까지 강릉선 KTX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때는 장자커우시까지 징바오고속철도가 들어갔다.

2.2. 객차

속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신칸센에 견줄 수 있도록 최고급으로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오로지 수송이라는 측면에만 집중해왔던 한국 철도청이 처음으로 승객들의 쾌적한 여행이라는 개념을 실현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열차였다. 당시에는 오로지 일반열차(통일호급)만 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당시 저런 호화 열차가 등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최상급"을 추구했기 때문에 전부 일본산( 히타치 제작소, 일본차량제조)이었다. 구입할 때 들었던 돈은 정부가 보유한 외환이었다. 차축 발전기로 선풍기 돌리고 간신히 전등이나 켜던 시절에 전용 발전차를 달아놓고 에어컨까지 설치했다. 1970년대에 에어컨이라고 하면 부의 상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굉장한 사치품이었고 대중화는 1990년대 초반에야 이루어졌다.[10] 에어컨이란 물건 자체가 가정에 거의 보급되지 않던 1960 ~ 70년대 대한민국 경제수준을 감안하자면 말 그대로 상위 1%만을 위한 열차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11] 이 당시에 국내에 에어컨이 달린 곳이라면 온도에 민감한 몇몇 연구소, 대형병원 특실, 외국계 특급호텔, 극장, 경주 석굴암[12], 관광호, 여객기(정확히는 여압장치) 정도뿐이었고 청와대조차도 없었다.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금수저인 시절이었다. 고속버스도 그 당시에 에어컨이 있다보니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즉 초호화 교통수단이었고 경쟁 대상이었다. 참고로 시내버스는 물론 시외버스도 당시 에어컨은 언감생심이었다. 시외버스는 무궁화호의 전신 우등열차가 도입될 즈음인 1970년대 후반, 좌석버스는 통일호가 에어컨이 장착된 이후인 1980년대 후반에 에어컨이 달리기 시작했고, 시내버스는 비둘기호를 대체하는 CDC 디젤동차가 도입되기 1년 전인 1995년에야 처음으로 에어컨이 달렸다.

좌석도 이전까지의 한국의 철도차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리클라이닝이 가능한 회전식 좌석을 전 차량에 도입했는데, 무려 당시 신칸센 1등차(그린샤)에 준하는 좌석이 적용되었다. 또한 유선/장대형 새마을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전용 컴파트먼트[13] 좌석까지 있었는데 집안에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있으면 잘사는 집안 취급받던 시절에 서민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사치였다.

대차도 당대 최첨단이었던 NT-21 대차를 사용하면서 쾌적한 승차감은 물론 대차의 설계최고속도가 150km/h에 달했다.[14] 1969년 당시에는 선형의 한계로 90km/h까지밖에 내지 못했으나 이후 140~150km/h로 상향되었다. 제동방식도 여태까지 쓰이던 답면제동 대신에, 당시로써는 최신 기술이던 디스크제동을 도입하였다.

그렇기에 이 열차를 타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재벌이나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같은 금수저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보면 될 정도로 고급 열차였다.

좀 더 자세한 내부모습과 당시 상황에 대해 잘 나온 선데이 서울의 기사가 있다.
2월 8일 하오 1시 20분 -「관광호」가 시험운행을 시작함으로써 24년 만에 우리나라에 1등 객차가 부활되었다. 「살롱·카」 「비즈니스·룸」 등 「딜럭스」 시설을 갖춘 이 「달리는 응접실」은 오는 4월부터 경부(京釜)간을 4시간 45분에 달려 「꿈의 초특급」 구실을 할 예정.
엷은 「오린지」빛 바탕에 하늘색 띠를 두른 이 「딜럭스」 열차는 특1등 1량, 1등 8량,「살롱·카」1량, 발전차 1량 모두 11량으로 편성된 호화판 객차로 우선 그 내부시설을 살펴보면 -

◇ 특1등 = 푸른 「카페트」가 깔려 있고 전기「히터」32개와「쿨러」(냉방시설) 6개가 달려 있어 자동온도조절. 좌석마다 안내원을 불러낼 수 있는 초인종이 달려있고 베개[15], 휴지통, 간이탁자 등이 있다. 뒤에 마련된 3석의 「비즈니스·룸」에선 사무를 볼 수 있는 탁자와 칸막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변소는 양식(洋式).
◇ 1등 = 종래 1량에 72좌석이던 2등에 비해 좌석 56개로 좌석 간격이 넓어서 좋다. 모든 시설이 특1등과 같으나 초인종, 「비즈니스·룸」, 베개가 없으며 변소는 재래식.[16]
◇ 발전차 = 종래의 객차발전은 객차마다 직류전원이 달려 있었으나 「관광호」엔 따로 발전차량을 달아 4백kW의 발전량으로 전력 공급. 이 전력은 2천 세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17]

이 「관광호」의 모든 객차, 발전차는 새로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총 236량)「관광호」의 도입값을 따져보면, 특1등 1량 2,250만원, 1등 8량(1량 2천만원) 1억 6천만원, 발전차 1량 3,598만원,「살롱·카」1량 2,520만원으로 총 2억 4,368만원이 된다. 가위 시설뿐만 아니라 가격면에서도「수퍼·딜럭스」열차.
철도청은 관광「시즌」에 대비, 외국인 국내관광객이 단체로 이용할 때에는 전세 운행도 할 방침. 한편 이「관광호」의 운행에 앞서 철도청은 12만 7천 입방m의 도상(道床)자갈을 보강하고 경부간만 약 12만개의 PC침목을 바꾸어 끼어 침목의 84%를 PC화 했다. 또 앞으로 1등 객차엔 그 시끄럽던 이동판매원을 타지 못하게 할 방침이라고.
8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떠난 「관광호」의 행운의 첫 시승(試乘)기관사는, 서울은 경력 15년에 32만여km를 무사고로 달린 김교원씨(서울기관차사무소소속), 부산에선 경력 16년에 70만km를 무사고로 달린 이동진씨(부산기관차사무소소속)[18]가 몰았다.
시승 당일 철도청은 국내외 귀빈들을 초청, 시승케 하고 여행용 「백」, 기념「메달」, 맥주, 「토스트」, 「코피」[19], 「카라멜」, 신탄진 담배[20], 과자 등 푸짐한 선물. 여기에 든 비용만 6백만원이란 얘기다.[21]
운행 도중 시승권 추첨놀이를 하여 가수 김「세레나」양이 추첨결과 1등 1377번의 이한용씨가 당첨, 3개월간 전선(全線)무임승차권[22]을 받고 2등은 1258번, 3등엔 1053번 등이 각각 당첨.
최연소 시승객은 L국회의원 아드님인 6살짜리 꼬마.[23] 이 꼬마귀빈은 수원역을 지나자 그만 잠에 골아 떨어져 「카라멜」을 손에 쥔 채 특1등객차 2좌석을 점령하고 단잠에 녹아 떨어졌다.
한편 철도병원에서 나온 의무반(의사 1명, 간호원 2명)에 첫 신세를 진 사람은 17세인 소하물(小荷物)운반원 서(徐)모군.[24] 서군은 물건을 나르다 왼손 식지 끝을 다쳐 응급처치를 받았다.
김기형 과기처장관, 이훈섭(李勳燮) 철도청장, 김「세레나」양이 한편에서 한담을 나누는가 하면 가수 최희준,「디자이너」「조세핀」조(趙), 김비함씨 등이 모여 앉아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지만 경부간 특1등 4,700원, 1등 4,200원으로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 이 엄청난 운행요금은 서민(庶民)들에겐 아직 그림의 떡.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참고로 1968년 4월 기준 한국 전체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이 11,010원이었고[25] 1969년 기준 여성근로자의 평균 월급이 9,000원,[26] 교사들의 평균 월급이 13,000원[27] 남짓인 시절이었으니 관광호가 얼마나 비싼 열차였는지 알 수 있다.

덤으로 한국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1969년의 1원은 2024년 2월 기준으로 정확히 28.372원이다. 상단 기사에 나온 숫자들에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대충 28.4배를 하면 현재 가치를 환산할 수 있다.

경향신문이 이 호화열차를 비판한 바 있다. 1969년 5월 1일 철길을 횡단하던 농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으려고 급정차하다가 탈선한 사고를 예를 들며 선로개량 등 조치없이 운행속도를 높이는 것은 모험이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3등석이나 2등석을 폐지한 것은 서민들에게 철도 이용을 어렵게 하며 소외감을 준다고 지적했고 초특급 열차 운행중지와 3등석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특히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의 경제 사정을 감안컨대 이 같은 요구는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을 것이다

2.3. 객차등급

특1등칸과 1등칸이라는 사치스러운 구성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서울 - 부산 간 운임은 특1등칸이 4700원, 1등칸이 4200원이었다. 참고로 위 기사에서 비교 대상인 비행기값이 4800원. 당연하지만 이걸 탈 돈이 있으면 웬만하면 돈 조금 더 내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게 더 나았다.

지금과는 경제구조가 여러모로 다른 시대였기 때문에, 이 금액이 지금 물가로 환산해서 어느 정도가 되는지 일률적으로 계산하기는 쉽지 않다. 1969년 특1등칸 운임인 4,700원은 2024년 최저임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70만원대 중후반 정도로 계산이 되고, 당시 언론기사에 따르면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다고 했는데 현재 보리쌀 80kg 가격이 13-15만원 정도 한다. 결국 관광호 운임은 현재 KTX 일반실의 12여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최빈국의 1이였던 한국의 서민들의 체감으로는 이보다 훨씬 부담스러웠다. 1973년 석유 파동 직전 평균 생계비가 3만 원 정도였고, 공장직이나 안내양같은 저임금 직종은 월급이 1만 몇천원 정도 받는 수준이었고 중위 공무원 월급이 2~3만 원대였으니 9급 공무원 초봉이 편도(...)운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가전제품 하나씩 사들고 온다는 월남전 파병 병사 월급이 1.5만 원 정도였으니 얼마나 비싼건지 감이 올 듯. 위의 보리쌀 한 가마 값 운운하는 것도, 먹을것이 지천에 흔한 오늘날에는 별 감흥이 없겠지만 이 때만 해도 매우 귀중한 식량이었으니 그 가치를 동등하게 보기도 어렵다[28].

대략 서민들이 느끼는 2024년 현재의 최저임금 수준을 고려하여 환산해 본다면 서울 - 부산간 왕복 운임이 최고 150만원 까지 나간다고 볼 수도 있다. 위 기사의 시내버스 요금 10원과 현재 서울 시내버스 요금 1,500원으로 비교하면 실제로 70-80만원 정도 나온다. 그 시절에 서울-부산 여행은 지금 해외 여행과 비견될 정도로 먼 거리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편도 운임만으로도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녀올 수 있고, 왕복 운임이면 , 사이판까지도 갈 수 있는 수준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운행하는 열차 중에서는 레일크루즈 해랑이 관광호와 비슷한 포지션이라 할 수 있겠다.[29] 해랑 가격을 나누어보면 3일 일정 기준으로 하루에 100만원, 4인 기준이니 25만 원으로 관광호보다는 훨씬 싸다. 게다가 해랑은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300만원이지만 관광호는 서울-부산 왕복으로만 최고 140-150만원이니 거의 창렬 수준이다. 2인실이 290만 원이며 계산해보면 1인당 약 48만 원, 이것도 하루 머물러 있는 거다. 가격만 봐도 관광호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열차였는지 알 수 있다.[30] 물론 이 당시에도 공무원과 대기업 종사자들 가운데서 타 본 사람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자기 월급으로 타기는 부담스러우니 회사 업무비로 탔을 것이다.(...)

3. 왜 도입되었는가?

말 그대로 관광용 호화 열차인데, 정확히는 외국인들(+ 국내 부유층)을 위한 특급이었다. 이 내용을 알려면 당시 시대상을 알아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이 1964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쟁으로 파괴된 낙후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불과 20년 만에 벗어던진 것도 그렇거니와, 하이테크 기업으로 무장했으면서도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아시아의 신비스러운 나라이자 세계적인 경제대국이라는 이미지메이킹을 하기 시작하자 한국인들도 이에 자극을 받았던 것인데, 특히 관광 자원을 서구에 팔아먹는다는 데서 그러했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일본이란 "5천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한국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역사를 가진 나라", 좀 거칠게 말하면 "한국 역사 짝퉁"[31]에 불과했기 때문에 → "어라 그렇다면 우리도 하면 되는 것 아냐?"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32] 특히 관광산업의 경우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면 그것이 곧 외화벌이가 된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 초반 한국관광공사가 설립되었고 본격적인 관광자원 개발을 시작하였다. 당연히 한국에도 역사적으로 자연풍경을 관광한다는 개념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팔도를 유람하며 남긴 수많은 시와 서화들이 그 증거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도 금강산선이 부설되어 관광객을 실어나르기도 했다. 비록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 경복궁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적지와 사적이 파괴되었다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유적지와 사적들을 개보수하고 파괴된 유적지들을 복원하는 작업도 병행하면서 관광지를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33] 그러나 문제점은 철도와 도로를 비롯한 현대적인 인프라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는것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에서 개발 가능한 가장 큰 관광단지였던 경주는 서울에서 접근하기 매우 불편했다.[34] 따라서 철도로는 서울과 국내 제2의 도시 부산을 연결하는 겸하여 관광호가, 버스로는 경부고속도로가 경주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지어지게 된 것이다.[35]

이런 목적의 관광열차는 사실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더 사례를 흔하게 찾을 수 있다. 일본은 말 할 것도 없고, 유럽의 명산들마다 설치되어 있는 저속의 ' 푸니쿨라' 궤도들까지 포함하면 이런 예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일본과 유럽은 고속열차와 광역전철로 여객철도의 대부분이 바뀌며 원래 존재하던 호화 일반열차들을 관광사업화 하는 면이 많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열차라면 관광용 장거리 열차의 정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일 것이다.

4. 새마을호 개편 후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편되고 객차와 기관차들이 그대로 인수인계되었으며, 관광호와 동일한 객차는 1982년까지 꾸준히 도입되었다. 1986년에 유선형 새마을호 객차와 1987년에 DHC 디젤동차가 도입된 이후에도 대부분 새마을호로 운행되다 1992년에 무궁화호 특실 객차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내구연한이 도래해서 퇴역했다. 관광호 객차는 1990년대 초중반에 이미 퇴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3량은 곡성 기차마을에 가면 볼 수 있다.[36] 또한 11035호는 정선선에서 정선아리랑열차의 전신 격인 '정선아리랑 유람열차'라는 이름으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운행되기도 했다[37]. 이야기에 의하면 그 중 한 량이 시험차로 무궁화호 도색에 99xxx호를 부여받고 끝까지 살아남았었다고도 한다. 이를 추적한 어느 철덕에 의하면 1968년에 일반실로 도입된 11060호가 1976년에 시험차로 전환된 뒤 1980년에 99311호로, 1997년에 99991호로 차량번호가 변경되었다. # 2005년에 차적에서 삭제됐다.[38]

5. 관련 문서




[1] 영문 명칭 출처 [2] 우연하게도 같은 시대를 누빈 보잉 747은 1969년 2월 9일에 처음 날아올랐다( N7470). [3] 속도는 현재의 KTX급, 서비스는 해랑 이상 [4] 관광호 및 새마을호 전용 대합실에서 계단 없이 승강장으로 바로 연결되었으나, 1988년 민자역사가 완공된 이후에는 5, 6번을 새마을호 전용 플랫폼으로 함에 따라 무궁화호, 통일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계단을 사용해야 했다. [5] 운행 초창기에는 대구역에 정차. 동대구역 개업일은 1969년 6월 10일이다. [6] 운행 초창기에는 부산진역 착발이었다. 당시 부산역은 부산역전 대화재로 인해 역사가 소실, 기능을 이관한 상태였고, 이후 새 역사를 신축해 1969년 6월 10일에 복구했다. 그것도 타는 손님들이 계단을 사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1번홈이 관광호 고정이었다. 이는 새마을호를 거쳐 ITX-새마을 운행 초창기까지만 해도 유지됐던 유서 깊은 전통이었으나, 현재는 모든 일반열차가 1번홈을 공유해 사용한다. [7] 불국사역 역사 내부의 사진들 중 첫 번째 사진과 동일한 사진이 있어 확인한 결과 7507호로 확인되었다. [8] 초창기에는 7500호대도 새마을호 도색을 한 경우가 있었다. [9] 새마을호로 개칭되기 2~3년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10] 한국 최초 에어컨은 LG전자(당시 금성사)에서 1969년에 출시했다. [11] 선풍기 있는 집안도 어느 정도 사는 집안 취급 받던 시절이었다. [12] 부실복원에 의한 이슬맺힘 방지에 대한 조치로 설치되었다. [13] 이후 KTX-산천에서 부활했으나 스낵바 철거로 인해 같이 없어졌다. [14] 단, 코일스프링 볼스터 대차인지라 현재 특급형 전동차에 주로 사용되는 에어스프링 링크암 볼스터리스 대차보단 승차감이 현저히 떨어진다지만 다른 열차들이 승차감이 매우 구리고 최고속도도 90~120km/h밖에 안 되는 프레스 대차(1996년~1999년에 도입된 CDC까지 적용됨)를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관광호의 승차감과 제일 가까웠던 객차가 같은 NT-21 대차가 적용된 무궁화호 나뭇결 초기형 객차다. [15] 링크 참조 [16] 당연하지만 당시 관광호의 위상을 생각하면 진짜 재래식인 비산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17] 참고로 현재 가구당 수전용량은 3kW 정도이다. 즉 오늘날 4백kW로는 130세대 정도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음에 그친다. 소위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가족구성원의 수는 줄어들었음에도, 가구당 전력 사용량은 그 시절에 비해 약 15배 정도 많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 2021년 현재 시점에서는 3kW 수전용량도 구식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서나 쓰는 용량으로 적은 편에 속한다. 신축 아파트나 주상복합, 오피스텔은 세대당 5kW가 기본. 2018년 폭염 이후 국민소득 증가, 누진요금 완화로 인해 기존에는 세대당 1~2대 설치하던 것을 넘어 현재는 방마다 에어컨을 설치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신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스템 에어컨이 보급되는 것도 한몫했다. 3kW 용량인 집은 모든 방의 에어컨을 풀가동 시 가끔 차단기가 떨어지거나 아파트의 경우 심하면 지하실의 변압기가 폭파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이 경우 용량증설공사를 하는데 돈이 좀 드며, 구축 아파트에 시스템 에어컨을 설치할 경우 필수이다. 주택의 경우 1~2백만원, 아파트 한 동당 2~3천만원 정도. 두꺼비집을 열어 보면 3kW의 경우 220V 20A나 25A 주차단기가 달리며(일부 30A) 5kW의 경우 220V 50A 주차단기가 달린다. 결론적으로 2019년 이후 개정된 건축표준인 세대당 5kW 기준이라면 고작 80가구밖에 못 쓴다. 비단 에어컨 뿐만 아니라, TV,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전자레인지 등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가전제품들이 대중화된 것은 물론, 전기레인지, 식기세척기, 의류관리기 등 새로운 가전제품들까지 등장한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18] 이동진 기관사는 나중에 국내 최초로 100만km 무사고를 갱신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19] 지금은 생소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남아있고 일본어 책을 중역하는 일도 허다했기에 일본식 어투가 많이 남아있었다. 실제로도 검정 고무신에 '냉장고와 코오피'라는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고. 해당 에피소드에서 커피는 미국에서 온 기영이 엄마 후배가 사 온 귀한 물건으로 묘사된다. 비록 1950년대 이후로 다방이 각 지방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기는 했지만 애시당초에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커피값이 결코 싸지 않았고, 1960년대에 커피 수입을 일시 금지시키면서 콩가루를 볶아만든 콩피같은 정체불명 음료수가 나오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다. 서민 이미지 취급받게 된 것은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커피 자판기를 대거 설치하면서부터였다. [20] 대전광역시의 신탄진이 맞다. 당시 신탄진에 국내 최대 담배공장 준공 기념으로 전매청(현 KT&G)에서 출시한 담배로, 1965년 출시 당시 가격이 무려 60원이었다. 관련 기사에서 인용한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1968년 서울 기준 시내버스 요금은 10원, 짜장면은 50원, 극장 요금은 130원이었는데, 해당 품목들이 정부의 물가 통제로 함부로 값을 올릴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매우 비싼 담배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비교 대상이 된 품목들의 2024.4월 현재 물가와 비교해 보면 담배 한 갑에 붙는 세금들을 과거 수준으로 공제하더라도 약 1만원 정도의 가격. [21] 모두 당시엔 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의 주석대로 물가를 계산해 보더라도 2024.4월 현재의 최저 임금을 고려한 물가로 최고 10억 가까이가 경품값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22] 모든 노선의 열차를 돈 안내고 탄다는 뜻인 듯하다. [23] 1962 ~ 63년생, 세는 나이 기준이라면 1964년생이다. [24] 마찬가지로 기사가 쓰여진 1969년 기준 나이이므로 1951 ~ 1952년생, 세는 나이라면 1953년생이다. [25] # [26] 참고자료 [27] 참고자료 [28] 한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량난에 시달리던 세계 최빈국이였고, 식량 증산은 정부의 매우 시급한 현안 중 하나였다. 관광호가 처음 운행된 1969년에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로 절대적인 식량난은 어느정도 해소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온국민이 넉넉히 먹고 살 정도는 아니었고 여전히 보리는 매우 귀중한 식량 자원이었다. 당장 극심한 빈곤 문제는 세계 최빈국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신흥 공업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1980년대 초,중반까지 문제였다. [29] 해랑은 전국투어 스탠다드 룸(4인) 패키지가 300만원이다. 대신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음식이 대부분이 공짜이다. [30] 현재 해랑역시 관광목적이기에 비싸지만 한국의 소득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현재, 일반인도 분명 사치에 가깝지만 정말 특별한 날을 위해 한번쯤 무리해 선택할 수 있는 관광패키지 정도지만, 관광호는 그 무리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한 시대였기에 서민에겐 정말 그림의 떡이였다. [31] 이런 관념은 36년 동안 그 '이류 국가'에게 근대화가 뒤처지고 나라마저 빼앗겼었다는 상처난 민족적 자존심 때문에 더더욱 심해졌다. 물론 역사적으로 제후국의 제후국에게 나라가 유린당한 중국은 더더욱 그 감정이 심해 아직도 사이가 좋지않다. [32] 사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전까지 한국의 집단적 관념이란 '선진국으로 진입하자'보다는 '일본을 이기자'에 더 가까웠다. [33] 하지만 이 당시에는 엉터리 복원들도 많았고, 광화문처럼 나중에 새로 개보수된 사례들도 있었으며, 강남 개발을 하려다가 풍납토성을 제대로 개발도 못하고 덮어버리거나 석촌동 고분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진다거나 했다. [34] 당시 한국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국제공항은 김포국제공항밖에 없었다. 부산의 김해국제공항은 생기기 전이었고 수영공항, 울산공항, 진해공항, 군산공항을 비롯한 지방공항들은 프롭기가 겨우 뜨고내릴 비행장 수준이었다. [35] 물론 관광호 도입이나 경부고속도로가 관광 목적으로만 지어진 것은 아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선형이 형산강지구대로 가게 된 것은 포항과 울산의 산업단지 조성을 백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관광호가 실제로 많이 다닌 구간은 서울~부산이었다. 물론 부산도 해운대해수욕장이라는 큰 관광자원을 갖고 있으며 국내 제2의 도시라는 규모는 그 자체로도 관광자원이 된다. [36] 2량은 무궁화호 도색에 식당으로 운영 중이고, 1량은 관광안내소로 운영 중이다. [37] 퇴역한 해당 객차는 현재 구절리역에서 매점으로 운영 중이다. [38] 진위 여부 확인이 필요한 소문에 의하면 용산정비창이 해체될 때까지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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