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3:52:17

곽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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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공식 레전드
SUWON SAMSUNG BLUEWINGS LEG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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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대학교 감독
곽희주
郭熙柱 | Kwak Heeju
<colbgcolor=#eb6d00><colcolor=#ffffff> 출생 1981년 10월 5일 ([age(1981-10-05)]세)
강원도 강릉시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1]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84cm, 77kg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학력 서울증산초 - 연천중 - 숭덕공고[2] - 광운대
프로 입단 2003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 <colbgcolor=#eb6d00><colcolor=#ffffff> 선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3~2013)
FC 도쿄 (2014)
알 와크라 SC (2014~201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5~2016)
감독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5~2016 / 플레잉 코치)
화성 FC U-12 (2017)
매탄고등학교 (2018~2019 / 코치)
원삼중학교 (2020~2021)
화성시 U-15 (2021~2022)
동원대학교 (2023~2024)
국가대표 6경기 ( 대한민국 / 2005~2008)
등번호 6, 29[3][4]
종교 불교
병역 면제[5]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국가대표 경력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K리그 최고의 수비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수원의 곽희주를 꼽겠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하니까.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선수이지만, 경기장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거칠다. 마치 인생의 마지막 경기를 뛰는 것처럼… - 데얀 (당시 FC 서울)[6]
전설이 될 그 이름[7]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 축구 선수.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 풀백. 현재는 동원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국내에서 계속 수원 삼성에서만 뛴 선수. 왼쪽 팔목에 블루윙즈 로고 문신을 새길 정도로 팀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다.[8]

2. 선수 경력

2.1. 프로 이전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서울불광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일일 강사와 연이 닿아 축구에 흥미가 생겼고, 이후 5학년 서울증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며 본격적으로 엘리트 축구를 시작했다.

증산초 졸업 이후에는 연천중 - 숭덕공고를 거쳤다. 중고등학교 내내 약팀에만 소속돼 경기에 지는 일이 많았고, 벌로 운동장을 도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체력을 길렀고,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또래에 비해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즈음에는 안양 LG 치타스의 입단테스트에 통과하며 계약 제의를 받았으나, 함께 테스트를 본 친구가 떨어지자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광운대학교로 진학을 선택했다.

광운대에서 수비수로 보직을 바꾸며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3학년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연습 경기에서 5골을 내줬지만, 산드로를 막아내는 그의 모습을 인상깊게 본 김호 감독에 의해 스카웃돼 3학년을 마치고 수원과 신인 계약함으로써 프로 선수가 됐다.

2.2.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3~2013)

김호의 아이들 마지막 세대로 팀에 합류했다.

2.2.1. 2003 시즌

신인치고 좋은 번호인 6번을 받으며 팀에게 기대받는 유망주로 인정받았다.

당시 수원의 주전 센터백은 김영선, 박건하였다. 곽희주는 비록 주전은 아니었지만, 자신과 동년배인 조성환, 조병국, 손승준 등과 함께 두 노장 센터백을 대신해 수원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센터백으로 각광받았다. 초반엔 기회를 거의 못 받았지만, 조병국의 대표팀 차출과 주전 수비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5월 21일, 울산 현대 호랑이와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특유의 투박함과 거칠고 잔실수가 많은 단점으로 인해 7월 이후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R리그에서만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쳤다.

2.2.2. 2004 시즌

2003 시즌 말, 불편한 눈 상태[9]와 주전 경쟁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축구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2004년 2월, 구단의 전지훈련 중 무단 이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창엽 피지컬 코치가 잠복 끝에 대천에 있던 곽희주를 데리고 팀으로 복귀시켰고, 결국 이탈 한 달 만에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팀 훈련에 참가했다. 그러나, 차범근 감독은 그를 철저히 외면했고, 2군도 아닌 3군에서 시즌을 시작했으며 등번호도 뒷번호인 29번으로 밀려났다.[10]

복귀 직후인 2004 시즌 초반, 당시 수원 수비진은 조성환, 조병국, 김영선, 크리스 등 핵심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인해 초토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수비진에서 곽희주만한 투지를 보이는 선수가 없었고, 차범근 감독은 곽희주를 콜업했고, 개막전 선발로 박건하와 함께 팀 스리백의 중심으로 중용했다. 그러나, 자책골을 넣는다거나 불안정한 수비로 거친 플레이를 일삼는 곽희주는 수원 팬에게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차범근의 무한한 신뢰에 보답하듯, 특유의 악착같은 수비로 좋은 모습을 보였고, 여름에 있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평가전에서, 판타스틱 포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수비에 임해 무실점으로 막아내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후반기 팀에 합류한 하비에르 무사가 오며 무사-박건하-곽희주로 이어지는 스리백 라인이 완성되며 팀의 수비를 강화했고, 후기리그와 플레이오프를 포함해 16경기에서 6실점이라는 견고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수원 구단의 5년 만에 k-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학창 시절 내내 그저 그런 선수로 평가받던 선수가 임의탈퇴 위기로부터 약 10개월 만에, 그리고 프로 2년 차 만에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될 만큼 발전을 이뤘다.

2.2.3. 2005 시즌

2005년에도 지난 시즌의 활약을 이어갔다. 시즌 전 열린 A3 챔피언스컵 K리그 수퍼컵에서 우승컵을 들며 3개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5월 대전 시티즌과의 원정 경기에서 시저스킥으로 꽂아넣으며 프로 데뷔 골을 기록했다. 심지어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홈경기에선 프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패배를 막았다. 그러나, 본프레레호에 차출되며 잔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시즌 말에 발목 부상으로 시즌 아웃돼 아쉬움을 삼켰다.

팀도 창단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리그에선 통합 성적 9위에 머물렀고, ACL에선 조별 탈락, FA컵 8강 탈락 등에 그쳤다.

2.2.4. 2006 시즌

지난 시즌 당한 발목 부상이 완쾌가 안 돼 시즌 초반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다 독일 월드컵 이후 복귀했는데, 당시 극도의 부진으로 인해 포백으로 포지션을 바꾼 수원에 센터백 라인은 무려 마토 이정수(축구)였다. 그래서 풀백이 가능했던 곽희주는 왼쪽 풀백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조원희를 밀어내고 주전으로 나섰다. 곽희주가 복귀한 수원은 수비력에서 안정감을 찾았고, 결국 후기리그 우승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 성남 일화 천마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또한 대한축구협회 FA컵에서도 전남 드래곤즈에 밀려 준우승 더블을 기록하는 아쉬운 시즌이 됐다.

2.2.5. 2007 시즌

2007 시즌에도 부상을 달고 살며 간헐적으로 결장했다. 컵대회 개막전 대전전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2주 만에 무리하게 복귀를 시도한 성남전에서 다시 부상을 당하며 약 한 달 간 결장했다. 이후 복귀해 꾸준히 마토와 수비 호흡을 맞추며 후기리그 6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9월 광주 상무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했다가 복귀한 울산전에서 부상을 당하며 또 한 달을 쉬었다. 그리고 포항과의 K-리그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선발 출전하며 복귀했으나, 전반 23분 만에 쓰러지며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수원은 3년 연속 메이저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2.2.6. 2008 시즌

시즌을 앞두고 주장 송종국과 부주장 김대의를 도울 중간 연령층 주장단으로 선정됐다. 신입단 주장단은 하태균.

4월 부산과의 컵대회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나오며 데뷔 첫 수원의 완장을 차게 됐다.

아무래도 전적이 전적인지라, 부상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으나, 6월 전남과의 원정경기에서 전반 9분 만에 부상으로 아웃되며 두 달 아웃됐다. 다행인건, 올림픽으로 인해 시즌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고, 부상 회복이 빨라 단 네 경기에만 결장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복귀한 수원은 스리백으로 포메이션을 변경했고, 마토 - 이정수 - 곽희주로 이어지는 철의 스리백을 가동했다. 전북과의 경기에서 5실점을 하며 흔들리기도 했지만, 다시 안정을 찾았다.

이후 12월 3일 슈퍼매치에서 골을 기록하는 등, 챔피언 결정전 맹활약을 통해 4년 만에 수원이 K-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0월에 삼성 하우젠컵 2008도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2.2.7. 2009 시즌

2009년 개막을 앞두고 팀 투표에서 직전 시즌 수원의 더블을 이끈 송종국을 누르고 수원의 주장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2008년이 끝나고 조원희, 신영록, 마토, 이정수 등 핵심 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선수 본인은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선수단을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했고, 경남전 비신사적 행위로 다이렉트 퇴장을 당하는 등, 심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겪다가, 시즌 중반 이운재에게 주장 완장을 넘기며 자신의 첫 주장직을 마무리 했다.

비록 리그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ACL에서도 16강에서 탈락했으나, FA컵에서 성남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둔 한 해가 됐다.

2.2.8. 2010 시즌

시즌 초반 8경기 1무 7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보이며 차범근 감독이 사퇴를 발표했다. 그래서 차붐의 생일날 펼쳐진 리그컵 개막전 전남전에 헤딩 동점골을 기록한 후 차붐에게 뛰어가 큰 절을 올리는 뭉클한 세레모니를 했다.

윤성효 감독 부임 이후에도 강민수와 호흡을 맞추며 주전으로 나섰고, 월드컵 휴식기 이후 초반 9경기 7승 2무의 상승세에 기여했다. 해당 시즌 K리그 및 리그컵 통산 200경기 기록을 세웠고, FA컵 2연패에 기여하는 등, 윤성효 감독 아래서 밝은 미래를 그렸다.

2.2.9. 2011 시즌

시즌 초반 복귀한 마토와 지난 시즌부터 경쟁하던 황재원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수비형 미드필더와 풀백을 오가며 특유의 멀티 능력을 발휘했고, 그렇게 주전자리를 찾았다.

윤성효 감독도 수비 보직과 관련한 다양한 포지션을 맏길 것이라고 밝혔고, 실제로도 서울과의 경기 때 3백의 오른쪽 수비수로 서서 활약하기도 했으며 가끔 수비형 미드필더 정도 위치로 올라가서 1.5선에서 수비를 해 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8월에는 두 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공수 양면에 걸쳐 팀의 트레블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팀 중앙 수비진이 부상 병동에 걸리며 혹사가 시작됐고, 가뜩이나 부상이 잦은 몸에 과부하가 걸려 상주전에서 부상을 당하며 두 달 아웃됐다.

이후 성남과의 FA컵 결승전에 선발 출전하며 부상 복귀했으나, 늘 그랬듯 전반 40분만에 부상으로 실려 나가며 시즌을 끝냈다. 해당 시즌을 기점으로 서서히 노쇠화가 시작됐으며, 주력이 느려진 것으로 보인다.

2.2.10. 2012 시즌

2012년 시즌에는 2009년에 이어 다시 한번 주장을 맡았다.

그러나, 2009년이 생각날 만큼 팀은 부진했다. 무엇보다, 전임 주장인 염기훈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기 때문. 곽희주는 상당히 부담감을 느꼈지만, 3년 전과 달리 팀을 잘 추스렸고, 큰 부상 없이 시즌을 완주했다. 특히, 7월 29일 인천과의 빅버드 경기에서 선제골을 직접 터트리고, 모든 선수들이 손을 맞잡으며 윤성효 감독에게 다가가 포옹하는 명장면을 골 세리머니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고 윤성효 감독은 경질됐다.

2.2.11. 2013 시즌

2013 시즌을 앞두고 같이 팀 동료로 활동하기도 했던 서정원 감독이 부임했다. 이로써, 수원에서 네 번째 감독 아래 활동하는 유일한 선수가 됐다.

5월 18일에는 프로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했고, 차기 레전드에게 기념 케이크를 받기도 했다.

2013 시즌이 종료된 후 계약이 만료되어 FA 자격을 얻었지만 수원의 운영비 삭감 정책의 후폭풍을 맞아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 팬들은 "'리얼 블루'마저 팀을 떠나게 한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사실 이 말은 명백한 오보이자 팬들의 오해이다. 왜냐하면 곽희주는 팀이 2008년 이후로 우승을 못 한 것에 대한 고민과 부담감 그리고 미안함이 너무 컸고, 구단의 미래와 선수로서의 마지막 도전을 위해 스스로 재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곽희주는 2013년 시즌이 종료된 후에도 구단의 자원봉사 활동에도 참여 하였고, 시즌 종료 후 치러진 그의 결혼식은 수원 삼성의 단장이 곽희주 본인의 부탁으로 직접 주례를 보았다. 이후 수원 구단에서 그를 버렸다는 기사가 나가자 다음날 직접 "그런 일은 절대 없다"라며 직접 반박하는 인터뷰가 실린 기사가 나오기까지 했다.

파일:external/www.bluewings.kr/2d5f8a219269142d5de75f3434310a98.jpg

2013년 마지막 경기에서 팀을 떠나는 곽희주를 위해 수원 팬들이 그의 등번호인 29번과 얼굴 가면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모습.

2.3. FC 도쿄 (2014)

이후 2014 시즌에는 자유 계약으로 FC 도쿄로 이적하였으나, 컵대회 2경기만 출장하고 9월 4일 소속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였다.

2.4. 알 와크라 SC (2014~2015)

같은해 9월 16일에 카타르 스타스 리그 알 와크라와 계약을 맺었다.

팀에 합류하자마자 5경기를 연달아 출전했지만, 이내 다음 경기들에선 명단 조차 들지 못하며 6개월 만에 계약을 해지했다.

2.5. 수원 삼성 블루윙즈 플레잉 코치 (2015~2016)

2015년 3월 24일에는 다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돌아와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수원과 1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선수 은퇴 후에는 스카우트를 꿈꾸고 있다고 밝혔다.

2.5.1. 2015 시즌

4월 4일 리그 4라운드 부산전 빅버드에서 복귀식을 거행했고, 5월 31일 인천 원정에서 후반 막판 고차원과 교체 투입하며 수원 복귀전을 치렀다.

그리고 제주 유나이티드 FC와의 6월 17일 원정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해 복귀 헤딩 골을 작렬시키며 4-3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플레잉 코치라는 직함과 나이, 그리고 원래 부상이 잦은 몸이라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2.5.2. 2016 시즌

2016 시즌을 앞두고 1년 재계약을 맺으며 마지막 시즌을 보내게 됐다.

역시 크고 작은 부상 및 징계 등으로 많이 뛰지는 못했고, 더군다나 서정원 감독이 포백과 쓰리백 사이에서 갈등하며 흔들리고 있던 수비진은 이정수와 곽희주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기에 불안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FA컵 8강전 성남 FC전에서는 연장전까지 쥐가 나도록 뛰면서 수비하는 노장의 투혼을 선보이기도 했다.

리그 10경기 출장에 그쳤으나 그 중에서 FC 서울과의 경기에만 세 차례 출전했고, 그 때마다 크고 작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일명 홀리 다이버 사건.

수원에서의 통산 300번째 경기이기도 했던 4월 30일 슈퍼매치에서는 후반 36분 골 찬스를 맞은 서울 아드리아노의 유니폼 상의를 잡고 늘어지다가 여의치 않자 발목을 손으로 잡는 비신사적인 반칙을 범했다. 규정대로라면 퇴장까지도 나올 수 있었지만 실제 판정은 경고에 그쳐 오심이 아니냐는 서울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연맹 상벌위 결과 퇴장성 반칙에 해당됨이 인정되어 출전정지 2경기 사후 징계를 받았다. 2달 후 유로 2016에서 헝가리 VS 포르투갈의 경기 중 헝가리의 졸탄 게라가 이 행동을 하면서 경고를 받았다.

6월 18일 상암에서 열린 슈퍼매치에서는 동점 헤딩골을 넣은 뒤 저 때의 반칙을 골 세레머니로 재현하며 여러 의미로 멘탈갑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ALLEZ ALLEZ ALLEZ>에 이 내용이 가사로 들어가 있다.

후일 은퇴 후 인터뷰에서 해당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아드리아노에게 범했던 파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내야 할 절박한 순간이었기에 일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이후 쏟아지는 비난과 파울 당시의 웃기게 나온 사진[11]을 보며 창피함을 느꼈다고 한다. 골을 넣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저 때의 상황을 골 세레머니로 재현하자는 생각을 먼저 해왔고, 공교롭게도 진짜로 골을 넣게 되면서 저 김칫국 마시는 발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으며, 이 골은 곽희주의 선수 생활 마지막 득점이 되었다.

8월 13일 슈퍼매치에서는 공중볼 경합에서 무리하게 발을 올려 윤일록의 얼굴을 발로 차는 비신사적 파울을 범한 뒤, 잘못 착지하면서 어깨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영상 워낙 잔부상들을 안고 살던 몸이라 회복에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 전망됐는데, 결국 남은 경기들을 뛰지 못하고 그대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경기는 나오지 못했지만, 주장인 염기훈과 함께 부진한 성적으로 처져 있던 선수단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힘썼다고 한다. 일종의 정신적 지주 역할.

2.6. 은퇴 이후

2017년 1월 2일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구단이 유소년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서울의 모 대학교 코치로 새출발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 현장감과 멀어진 느낌의 유스보다는 프로에 가까운 위치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어 대학 코치를 선택했다고.

그러나 대학교 코치직은 불발되고, 대신 코칭 커리어를 기초부터 다져나가기 위해 모 대학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스포츠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무엇이 선수를 위축되게 만드는지를 이해하며, 그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론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새로 창단한 화성 FC U-12팀 감독으로 활동했다. 2017년 7월 30일 제2회 국토정중앙배 전국유소년축구대회 8세 이하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부임하자마자 우승을 하게 됐다.

또한 한국프로축구선수 협의 이사로도 선임되며 행정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카타르 시절 임금 체불 문제를 김훈기 선수협 사무국장의 도움으로 해결하면서 결심을 굳혔었다고 한다.

은퇴 후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수원의 역대 베스트 11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FW - 에두 나드손
MF - 김대의 이관우 김은선 염기훈
DF - 이정수 마토 곽희주 송종국
GK - 이운재

3월 11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K리그 클래식 첫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구단에서는 영구결번을 제의했지만 29번을 달고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후배가 나오길 바란다는 뜻을 밝히며 스스로 거절했다. 그리고 1년만에 등장했다![12]

201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U-18 유스 팀인 매탄고등학교 축구부의 저학년부 코치로 부임했다. #

2019시즌부터 주승진 감독이 2군 코치로 내부 승진을 함에 따라 매탄고등학교 감독으로 선임될거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코치직을 유지하게 되었고, 신임 감독은 김석우가 되었다.

2020년 용인시축구센터 원삼중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21년에는 숙명의 라이벌 팀 출신인 하대성이 코치로 합류해 함께 힘을 팀을 이끈다고 한다. # 중딩 팀에 국대급 레전드가 둘이나 있다니...

2021년 12월, 화성시 U-15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22년 8월 감독으로 첫 전국대회(금강대기) 우승을 달성했다. # (경기M-RESPEC 7권역 리그 우승, 전국 왕중왕전 8강)

3.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파이터'로 끈적끈적한 대인 마크에 강했다. 신인 시절부터 한번 공격수가 보이면 계속 압박하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데얀, 이동국 같이 결정력은 좋지만 스피드나 피지컬이 정상급은 아닌 스트라이커들에게 유독 강한 모습을 과시해 왔다. 중앙 수비수 치고는 발도 빠른 편.

리더십도 갖추고 있지만 라인을 조절하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부족한 모습을 보여서 마토 이싸빅, 조성환과 같이 수비 라인을 리드해줄 수 있는 수비수와 짝을 이루어야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같은 한계로 국가대표 경력은 6경기에 불과하다.

곽희주가 은퇴한 뒤 그의 후계자로 민상기가 뽑히는데, 둘의 플레이스타일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민상기는 라인 리딩도 좋고 공중볼에 강점이 있지만, 발이 빠르진 않으며 공중볼과는 달리 슈팅은 매우 약한 편이다. 반면에, 곽희주는 준족에 공격력도 꽤나 있어서 뜬금포 득점를 터트리기도 했다. 공통점은 둘 모두 리더십을 가진 파이터스타일이라는 것, 그리고 잔부상이 잦은 유리몸이라는 점이다.

4. 국가대표 경력

프로 입단 1년 차인 2003년,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하는 김호곤호에 선발되긴 했으나, 무단 이탈 이후 대표팀과 멀어지며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다.

2005년 5월, 본프레레호에 발탁되며 개인 커리어 첫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됐고,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김동진과 교체 출전하며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어진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명단에도 포함되며 조 본프레레 K-리그에서 보여준 투지있는 모습과 유틸리티 능력을 인정받았다.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차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전반 40분만에 부상으로 교체됐다. 그러나,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아 이어진 북한과의 남북통일 축구경기에서 후반 20분 가량 출전했다. 하지만, 해당 경기는 비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A매치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본프레레 감독이 경질되고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감독에 이르기까지 투박하고 잔부상이 많은 곽희주는 외면받으며 대표팀과 연이 없었다.

그러다 2008년 1월, 곽희주를 처음 대표팀에 선발했던 허정무호가 출범하며 1기 멤버로 약 2년 6개월 만에 파주 NFC에 복귀했다. 약 6개월 간 꾸준히 기회를 받으며 대표팀 레귤러로 자리잡나 했지만, 6월 소집 중 오른쪽 허벅지 근육통을 호소, 6월 이후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하며 국가대표 커리어를 끝냈다. 통산 A매치 6경기 출전.

우선, 곽희주 나이 또래의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축구를 대표했던 선수가 바로 홍명보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동년배 중에 준척급 수비수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그의 프로 초기 김호곤 ~ 코엘류 시절에는 조병국, 박요셉, 박용호, 조성환 등이 중용을 받았고, 본프레레 ~ 베어벡 시절에는 김진규, 김치곤 그리고 강민수가 사실상 수비 유망주 자리를 삼등분했으며 이후 허정무 시절에는 이정수, 곽태휘, 조용형, 김형일 등의 선수들이 포텐을 터트리며 부상이 잦았던 곽희주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실력에 비해 국가대표 커리어를 제대로 못 쌓았다.

5. 여담

  • 선천적으로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축구하는 데 그다지 불편하지 않아서 방치했고, 성인 시절 고치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늦어 신경병이었는데 십년넘게 방치해 신경이 손댈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 이유로 군대는 면제 처리되었지만 본인에게는 흑역사.
  • 고등학교 때 축구부가 완전히 문제아들의 집단이라 그만둘 뻔한 위기에 처했으나[13]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고 한다.
  • 어렸을 때 축구를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시작했으나 그가 사기꾼이었다[14]. 당시 가족이 금품갈취를 당하는 등 고생이 심했다고.
  • 한 때(2003년) 도저히 프로에서 버티지 못해(각종 이유가 있겠지만, 김호 당시 수원 감독과의 불화가 가장 컸던 걸로 추정) 팀을 무단 이탈했다. 당시 충청 대천에 있는 바닷가로 내려가 하룻밤을 보낸 후, 위치 추적을 이용한 코치 한 명에게 설득당해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15]
  • 축구장에서 보이는 터프하고 거친 모습과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이며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고 한다.
  • 어린시절 꿈은 골키퍼였다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등번호인 29번의 첫번째 후계자는 똑같이 수원의 전설을 꿈꾸는 골키퍼가 되었다.
  • 용인시축구센터 u-15 원삼중학교 감독을 맡은 당시에 전지훈련도중 선수들에게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줄만큼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6. 관련 문서



[1] 축구는 서울에서 시작했다. [2] 현재 이름은 세명컴퓨터고등학교로, 2001년 교명 변경. 이때 안양 LG 치타스의 테스트에 합격했으나 같이 참가한 동기가 떨어져 대학으로 갔다고 한다. [3] 한때 영구결번 이야기가 오갔을 정도로 곽희주의 상징과도 같은 번호다. 하지만 선수의 뜻에 따라 결국 영구결번은 되지 않았다. [4] 원래는 6번을 달았다가, 후술할 일로 인해 불미스럽게 뒷번호를 배정받았지만, 오히려 현재는 수원 팬들에게 곽희주를 상징하는 등번호로 인식되고 있다. [5] 한쪽 눈 시신경 이상으로 인한 면제. 선천적이었다고 하나 어릴 때는 별로 불편한 게 없어 고치지 않은 게 독이 되었다. [6] 곽희주가 은퇴하고 떠난 지 약 1년 후, 데얀은 곽희주가 뛰었던 팀으로 오게 된다. [7] 현역 시절 빅버드 소개 멘트. [8] 문신 위치로 왼쪽 팔목을 선택한 것은 왼손잡이라서 제일 잘 보이는 곳이기 때문. [9] 왼쪽 눈 실명, 오른쪽 눈 시력 0.7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경기 중 불편함이 너무 심해서 축구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10]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그를 상징하는 번호가 되어버렸으니 인생사 새옹지마. [11] 저 사진은 서울 팬들이 비난할 때도 거론했지만, 수원 팬들도 '홀리 다이버'라는 이름을 붙이고 현수막으로 만들어 응원하는데 쓰기도 했다. [12] 상술된 박지민의 군입대로 2021시즌 수원의 29번은 수원 유스팀인 매탄고등학교 출신 정상빈이 물려받았고, 29번을 단 정상빈은 만 19세의 나이로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울산 현대, 전북 현대 모터스 등 리그 강팀들을 상대로 득점포를 가동하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마침내는 데뷔 시즌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상파도 여럿 탈 정도로 인기를 끈 매탄소년단 열풍을 일으킨게 정상빈이라는 점과 매탄소년단 정상빈, 강현묵, 김태환 모두 곽희주의 매탄고등학교 코치 시절 지도를 받은 선수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수원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 중 하나였던 곽희주는 그의 바램대로 그의 등번호를 달고 뛰어난 활약을 이어나갈 후배를 길러낸 셈이 되었다. [13] 당시 어느 정도였냐면, 일반 학생들도 축구를 못하게 하려고 학교 운동장 곳곳을 중장비로 팠다고 한다. [14] 전과도 수두룩했다고 한다. [15] 수원의 전 감독이자 당시 수원의 트레이너였던 이임생이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