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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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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y Kildall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aryKildall.jpg
본명 게리 알렌 킬달
Gary Arlen Kildall[1]
출생 1942년 5월 19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사망 1994년 7월 11일 (향년 52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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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기업인
모교 워싱턴 대학교
활동 1972년 – 1994년
서명
파일:Gary_Kildall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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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 MS-DOS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운영체제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던 CP/M BIOS의 제작자.

별명은 빌 게이츠가 될 수 있었던 사나이.

2. 생애

하버드에 입학은 했으나 중퇴해 버리고 사업을 시작한 빌 게이츠와는 달리 이 양반은 워싱턴 대학교에서,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여 학-석-박사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며, 아내 도로시 맥윈 킬달[2]과 함께 디지털 리서치라는 회사를 세우고 CP/M이라는 초창기 컴퓨터 운영 체제를 개발하여 당시 시장을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CP/M은 당시 쓰이던 컴퓨터들에 쓰이던 운영 체제 중 가장 성능이 탁월했고 시장에서의 인기도 좋았다.

그러던 중, IBM도 IBM PC용 CP/M을 제작 의뢰하기 위해서 게리 킬달과 접촉했다. IBM은 처음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접촉했지만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메인프레임 운영 체제를 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빌 게이츠가 게리 킬달을 대신 소개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게리 킬달은 종종 도로시 맥윈 부사장에게 대신 협상을 맡겼고, IBM의 대표는 방문 목적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부사장에게 비공개 협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도로시 부사장은 게리 킬달의 동의 없이는 그런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며 거절했기 때문에 협상은 중단되었다.[3]

IBM측 대표가 접촉해왔을 때 게리 킬달은 자가용 경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게리 킬달 본인은 몹시 화를 내며 부정했지만, 주변 인물들의 말로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당시 흔하게 알려진 '레저를 즐기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컴퓨터 제조사에 소프트웨어를 전달하기 위해 자가용 경비행기를 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사무실에 돌아와 IBM과 다시 접촉했고, 게리 킬달 본인도 IBM과 의견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협상을 중단한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놀면서 IBM과의 협상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어쨌든 결국 IBM은 게리 킬달과의 거래를 포기하고, 당시 마이크로컴퓨터 운영체제 쪽으로는 듣보잡에 가까웠던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MS-DOS[4]로 계약했다. 이후 디지털 리서치 측이 MS-DOS/PC-DOS가 CP/M의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자 IBM은 다시 게리 킬달과 접촉했고 디지털 리서치는 IBM을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IBM PC를 시판할 때 PC-DOS와 함께 CP/M도 판매하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미 주 운영 체제는 MS-DOS/PC-DOS로 결정되어 있었으며, CP/M의 가격은 240달러였던 반면 MS-DOS의 가격은 40달러로 무려 6배의 가격 차이가 났다. 여기에, MS-DOS는 IBM PC와 함께 출시해 소비자들에게 '정품' 이미지로 각인된 반면, 디지털 리서치 사의 운영 체제는 출시가 반년이나 늦어져 버려 '호환품' 내지는 '선택지 중의 하나' 같은 이미지가 붙어 버렸다. 이러니 MS-DOS가 잘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리 킬달은 이후 가격 책정에 대해 IBM의 탓을 했으나, PC-DOS의 점유율이 완벽하게 폭망하기 전까지 게리 킬달이 직접 본인의 입으로 프리미엄 가격 정책을 내세우며 고집했고 MS-DOS를 '장난감 운영 체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MS-DOS는 취미용 운영 체제이며 자신들이 만든 CP/M은 본격 작업/업무용 운영 체제로 퀄리티에 격차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후 IBM이 PC의 개발 관련 문서를 완전히 개방하면서 그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PC 제조사가 생겨났고, 그 회사들 역시 MS-DOS를 구매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이크로컴퓨터용 운영 체제의 개발사는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바뀌었다. 패권을 완전히 잃은 것.

그 후 디지털 리서치는 DR-DOS를 출시하는 등 떨어진 시장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당시 게리 킬달은 마이크로컴퓨터에서 BASIC의 확산을 우려하여 CP/M을 운영 체제로 하는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전체 PL/I 프로그래밍 언어의 ANSI 표준 부분 집합인 PL/I-80을 만들거나,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로고나 CD-ROM 드라이브와 비디오 디스크 사이의 인터페이스 구현, CD-ROM 버전의 Grolier's를 제작하는 것 등의 여러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하지만 좋은 성능과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형 PC 업체와 MS-DOS 사이에 맺어진 기존 계약을 뚫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대세는 디지털 리서치에서 마이크로소프트로 기울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게리 킬달은 시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1991년에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매각함과 동시에 본인도 은퇴하면서 컴퓨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업과는 별개로 게리 킬달은 컴퓨터에 관한 TV 방송 프로그램인 <컴퓨터 크로니클스>의 진행을 맡아 1983년부터 1990년까지 활동하였다. 문제는 방송 일을 했던 만큼 매스컴과 얽히는 일도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기자들이 위의 얘기를 자꾸 꺼내면서 자신을 시대를 못 읽은 얼간이 정도로 취급하는 일이 많아서 그 때마다 정말로 화를 냈다고 한다.[5] CP/M 원본을 만들어낸 것은 자신인데, 빌 게이츠는 CP/M 클론을 가져다가 시작한 MS-DOS로 떼돈을 벌었을뿐만 아니라 그 덕에 IT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빌 게이츠만큼 세계적 대부호가 아니었을 뿐, 1991년에 은퇴하면서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1억 2천만 달러에 매각했으며 유산도 수억 달러나 남긴 부유층, 아니 충분히 부호 소리 들을 정도의 레벨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운영체제 시장을 빼앗겼던 것이 일생의 분함으로 남았던지, 생애도 길지 못했다. 1994년 7월 8일,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Franklin Street Bar & Grill'라는 바에서 술에 취해 뒤로 넘어졌는데, 이 때 받은 두부 충격으로 인해 경막 하부에 혈종이 생겨서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3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52세. 사망했을 당시 그는 알코올 의존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3. 평가

시대 상황을 가늠하고 CP/M를 개발하는 등 나름대로의 안목과 실력을 갖춘 우수한 엔지니어였지만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 크나큰 패인인 비운의 인물.

하지만 이 부분은 빌 게이츠가 대단하게 성공한 것이지 딱히 게리 킬달이 실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가 마이크로소프트 대신 IBM의 계약을 따내었다고 해도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만큼 성공했을 거라는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뛰어난 기술력에 비해서, 사업가로서는 빌 게이츠와 비교하면 약간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정도다.[6][7] 그리고 컴퓨터 산업에 크게 공헌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4. 기타

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 성격은 외향적인 스포츠맨이었다고 한다. 레이싱 매니아에 경비행기도 즐겨 몰았고 바다를 매우 좋아했다.

두 번 결혼했으며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스콧 킬달은 시각 미디어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1] 출처 [2] 1943년생. 고등학교 때부터 게리 킬달과 사랑에 빠져 결국 1963년에 결혼했다. 1962년부터 워싱턴 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으나 남편 지원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였다. 1983년부터 별거 후 이혼했으며 2005년 뇌종양으로 사망. [3] 이에 대해서는, 디지털 리서치 측이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선호해서 양복입은 비즈니스맨식 일처리를 싫어했다는 말도 있고 이 협상이 전형적인 갑을 관계로 이루어진, 디지털 리서치 측에게는 매우 불공평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하지만 IBM과 계약하여 결과적으로 IBM보다 더 큰 회사가 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인 만큼 그들의 운과 선견지명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4] 초기 MS-DOS는 16비트 운영 체제이면서 CP/M 응용 프로그램 호환성을 기본으로 설계했다. 확장자가 COM인 실행 파일은 이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응용 프로그램 제작사들이 기존 CP/M용 응용 프로그램을 작은 수정 혹은 재컴파일 만으로 MS-DOS용 응용 프로그램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만큼 당시 CP/M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5] 게리 킬달 사후에 그의 회고록을 지인들에게 배포했는데, IBM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철천지 원수처럼 깠다고 한다. 논란이 일만한 내용이 있었는지 2016년에서야 유족들이 일부 공개할 정도. 사실 당사자 앞에서 시대를 못 읽은 얼간이 취급하면 화 안낼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6] 사실 이후에야 어찌됐든 8비트 운영체제 시장을 완전히 점령했었던 만큼, 이 사람을 사업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하는 건 어폐가 있다. 아직 제대로 된 OS 개념도 부족하던 시절에(물론 PC 기준이다) 난립하던 수 많은 컴퓨터들에 공통된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이후 컴퓨터 제조사들이 설계부터 CP/M을 의식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뛰어나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위에 나와있듯이 IBM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먼저 접촉했고 이 때 빌 게이츠는 디지털 리서치와 연결시켜주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빌 게이츠는 처음부터 IBM PC의 운영체제 시장을 높게 평가한 안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IBM PC용 BASIC 인터프리터와 오피스 등을 판매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만약 이 때 게리 킬달이 IBM과 계약하고 CP/M 계열이 주 운영체제가 되었다면 둘의 상황이 반대가 되어있었을 수도 있으며 빌 게이츠는 OS 시장을 버리고 낡은 BASIC 인터프리터에 집착한 얼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다. [7] 물론 위에도 적혀있다시피 게리 킬달의 실책도 분명히 있다. 가격 정책도 그러하며, 또 하나의 실책으로는 CP/M-86을 개발하면서 시스템 콜(BDOS) 호출 방식을 기존 CP/M-80의 CALL 5 방식에서 INT E0h로 바꿔버렸는데, 이로 인해 황당하게도 CP/M-80 호환성이 CP/M-86보다 오히려 MS-DOS가 더 나은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정확히는 둘 다 바이너리 호환성은 없었고, 소스 코드 호환성에서의 얘기인데 MS-DOS의 경우 기존 CP/M-80으로 개발된 소스를 거의 수정없이 재컴파일하는 것으로 이식이 가능했으나 CP/M-86의 경우 BDOS를 직접 호출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부터 다 바꾸어야 했다. 물론 이것이 그렇게 이식에 큰 악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MS-DOS에 패배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프로그램적 트릭으로 CALL 5를 지원했던 MS-DOS에 비해 불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