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22:36:54

가마모토 쿠니시게

일본의 前 축구 감독
파일:가마모토.png
이름 가마모토 쿠니시게
釜本邦茂
출생 1944년 4월 15일 ([age(1944-04-15)]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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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1cm[1]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학력 와세다대학
소속 선수 얀마 디젤 (1967~1984)
감독 얀마 디젤 (1978~1984)
마쓰시타 전기산업 / 감바 오사카 (1991~1994)
후지에다 MYFC (2009)
소속 정당

국가대표 76경기 75골[2] ( 일본 / 1964~1977)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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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정치인.

2. 선수 경력

유소년 시절에는 원래 야구를 하려고 했지만, 축구에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축구 지도자로부터 야구를 하면 일본이나 미국 정도지만 축구는 올림픽도 있고 세계적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축구로 전향했다고 한다.

가마모토는 유소년 시절부터 그 득점력이 특출났다. 그는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간토 대학 축구 리그에서 4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대학 졸업 후 가마모토는 일본 사커 리그에서 득점왕을 통산 7번, 어시스트왕을 통산 3번 차지했으며, 리그 베스트 11에는 통산 14회 선정됐고,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은 통산 7차례 수상했다. 리그에서 통산 202 득점( 해트트릭 13회), 79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두 기록 다 일본 사커 리그 통산 1위 기록이다.

그의 이름을 세계 축구계에 알리는 활약도 보였는데 그 무대가 바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3]이다. 당시 올림픽 축구는 아마추어 대회였지만 현재처럼 연령 제한을 걸지는 않았으며, 프로 축구 리그를 갖춘 남미와 서유럽 국가들은 정예 멤버를 보낼 수 없었지만 대부분 프로가 아닌 실업 리그를 갖춘 동유럽 국가들과 타 대륙 국가들은 최정예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남미, 서유럽 국가들의 전력이 깎인다 해도 축구 변방인 아시아 국가들에게 벅찬 상대인 건 변함 없었다. 실제로 4년 전인 1964 도쿄 올림픽 축구 본선[4]에는 우리나라가 진출에 성공했으나 3경기에서 무려 1골 20실점 최하위 14등으로 깨지면서 FIFA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세계 무대의 벽을 실감했다.[5]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 예선에는 18개국이 참가했는데 여섯 국가씩 세 개 조로 나뉘어 각 조 1위가 본선 티켓을 가지기로 정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나라와 한 조로 묶이면서 티켓 하나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초반 세 경기를 양국이 모두 승리했으나 일본이 득실차에서 압도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한일전에서 무승부만 거두어도 일본의 진출이 유력해지는 상황이었다.[6] 그리고 네 번째 경기인 한일전에서 난타전 끝에 3:3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때 가마모토도 1골을 득점하며 무승부에 일조했다. 그렇게 일본은 남은 남베트남전을 승리하면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7]

조별 리그[8]에선 스페인, 브라질, 나이지리아와 묶이게 되었는데, 비록 스페인과 브라질은 23세 이하 선수들이 대부분을 이뤘지만 난이도 높은 상대임은 분명했다. 가마모토는 나이지리아와의 1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귀중한 1승의 주역이 되었고, 이후 일본은 브라질, 스페인과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두며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 프랑스전에서도 가마모토의 활약은 계속되었는데, 선제골과 결승골을 넣으면서 3: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4강에서 만난 헝가리는 최정예로 출전했고 0:5로 대패하며 동메달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가마모토는 혼자 2골을 넣으며 일본에게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축구 메달을 선사했다.[9] 일본의 3승은 모두 가마모토의 발 끝에서 나온 셈. 사실 당시까지 일본 축구의 성적은 아시안 게임 동메달 2개에 그치며 아시아 내에서도 대표적인 강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격적인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가마모토는 총 7골로 대회 득점왕도 차지했다.

올림픽 이후 일본은 특별한 결과를 만들지 못했지만 가마모토만큼은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일본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된다. 그의 A매치 통산 득점 기록은 76경기 75골로 대부분 아시아 무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경기 당 1골에 육박하는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10]

3. 플레이 스타일

오른쪽 45도 각도에서 차는 강력하고 정확한 오른발 슛이 일품이었지만 왼발 슛도 뛰어났다. 또한 스피드도 빠른 편이었고 헤딩 능력도 뛰어났다. # 참고로 가마모토 본인은 자신의 슛에 대해 오른발 슛이 5할, 왼발 슛이 3할, 헤딩슛이 2할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

4. 평가

1960~70년대에도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강세를 보였으나, 가마모토만큼은 요주의 대상이었다. 가마모토 본인은 한일전에서 7골을 넣으며 팀 성적과는 별개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가마모토가 밝히길 당시 김호가 자신을 집중 마크했는데, 김호는 자신의 친구가 아니며 자신을 너무 많이 때렸다고 증언했다. 이차만의 경우 경기장에 못을 가지고 가서 몰래 찔렀다고 하고, 골키퍼인 이세연은 펀칭하는 척 주먹으로 뒤통수를 치는가 하면, 일본 선수들 얼굴에 침을 뱉는 선수도 많았다고 한다.[11] 이세연의 경우 가마모토가 한국의 이회택, 차범근보다 뛰어났다고 말하며, 김호 역시 차범근보다 가마모토가 낫다고 말했다. 이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뛰던 시절이 가마모토와 거의 비슷하다. 또, 차범근이 대표팀 초년생 시절 이 선수들은 이미 대표팀 최고참 격이었다. 따라서 가마모토에 대한 인상이 유망주 시절의 차범근보다 더 강렬하게 남았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이회택과의 비교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특히, 이세연은 한일전에서 강한 열의와 이에 따른 거친 플레이를 보여준 만큼 반일감정을 가졌던 선수인데 가마모토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당시 일본 축구는 아시아에서도 약체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의 에이스로 올림픽 득점왕과 동메달에다 A매치 76경기 75골을 득점하며 일본을 이끌었던 가마모토의 실력은 상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그의 업적은 충분히 역대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

5. 기타

  • 1978년부터 1984년까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83년과 1984년에는 JSL컵[12] 우승을 차지했다.


[1] 가마모토 본인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다. 출처 [2]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자 [3]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 [4] 북한과 이탈리아가 기권 실격되어 14개국 본선 진출 대회로 진행되었다. [5] 그래도 홈팀 일본은 아르헨티나를 3:2로 격파하며 8강(8위)을 기록했다. [6]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 차 승리가 여기서 나오기도 했다. 필리핀을 상대로 15:0으로 승리했는데 정확히 50년 전인 1917년에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이끄는 필리핀에게 2:15로 대패한 참사를 설욕한 셈이다. [7] 우리나라로선 5경기 4승 1무로 호성적을 거뒀음에도 올림픽 진출이 무산된 것인데, 더욱 안타까운 것이 남은 2개 조는 12개국 중 7개국이 기권을 하면서 남은 팀들이 수월하게 경쟁을 했다. [8] 16개국 본선 16강 조별리그 [9] 두 번째가 2012년에 우리나라 U23 대표팀이 딴 런던 올림픽 동메달이다. [10] 참고로 75골은 일본축구협회 기록이고 FIFA는 가마모토가 일본 대표팀에서 기록한 통산 득점이 80골이라고 발표한 바 있는데, 이는 A매치로 인정하는 경기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11] 그리고 이세연 본인도 이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났다. [12] J리그컵의 전신격인 대회.